-엄마의 태도를 배우는중입니다#3-
“아, 왜 이 상황에서 화를 안 내는데? 화 내도 되잖아 지금은!”
“그렇긴 한데, 화낸다고 당장 뭐가 달라지겠어?”
연애 포함 14년의 세월 동안 남편과 다툰 적을 곰곰이 떠올려 보면 대체로 저런 대화가 끼어있었다.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나 지금 열 받았거든요?’ 누가 봐도 딱 알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나와는 다르게
‘조금 난감하군요.’ 정도의 표정으로 상대와 대화를 시도하는 남편.
언성을 높이거나, 격분하거나, 태도가 거칠어진 채 상대와 대화를 하는 건 연애 포함 14년 동안 본 적이 없다.
우리 쪽에 손해가 생길 것 같은 상황이 되어도, 상대가 무례하게 굴어도 남편은 언제나 이성적이었는데, 옆에서 지켜보는 나는 분통이 터진다.
'이 머저리 같으니라고! 그렇게 착해 빠져 가지고 어떻게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어!!'
불길이 솟구치는 내 마음과는 다르게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는 남편을 보고 있으면 명치에서부터 전투력이 상승됐다.
‘나라도 나서야겠어!’ 싶었던 것.
뭐가 됐건 손해는 보고 싶지 않았다. 물질적인 것이든 감정적인 것이든. 내 기분을 이렇게 상하게 했으면, 나도 너의 기분을 똑같이 더럽게 만들어 주마! 뭐 그런 식.
그리고 마지막엔 늘 남편에게 화살이 날아갔다.
나랑 같이 화를 내줘야지!!
하지만 머쓱하게도 문제 상황을 해결하는 쪽은 대체로 남편이었다. 혼자 씩씩대며 어떻게 맞받아쳐야 저 사람의 코를 납작하게 해 줄 수 있을까?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야말로 ‘대화’로 ‘좋게 좋게’ 상황을 풀어놓곤 했다.
나는 늘 석연치가 않았다. 결과야 어떻게 되었든 과정 속에서 한번 상한 기분은 좀처럼 풀어지지 않았던 탓이다.(성격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평소엔 그렇지 않습니다)
손해를 볼 것 같거나, 입장이 곤란해 지거나, 상대가 무례하게 구는 상황에서 왜 제대로 강한 한방을 먹이지 않는 거야? 남편에겐 늘 그런 의문이 있었다.
단순히 성격 문제 인줄로만 알았다.
온순한 사람이라서. 사람을 좋아하는 편이라서. 평화주의자라서.
그럼 난? 거칠고, 사람을 싫어하고, 비평화 주의라서 그렇게 날을 바짝 세우는 건가. 아니라고. 나도 평소엔 그렇지 않다고! 그러면서도 내 성격에 문제가 있는가 조금은 의심을 하게 된다. 좋게 문제를 처리한 남편 때문에.
그래서 마지막엔 늘 비슷한 항변으로 마무리했다.
‘네가 말 안 하니깐, 나라도 해야지! 우리 입장을 어필해야 할 거 아니야.’ 그럼 남편은 ‘맞지 맞아.’ 같은 대답을 대충 얼버무렸다.
그리고 내 화가 사그라들었을 때쯤, 상대방의 입장을 내게 전해주었다. 사장에게 보고서를 제출하는 말단 직원의 모습처럼 말을 했지만 남편의 말이 끝나면 언제나 ‘내가 좀 너무 했나?’와 같은 생각이 들곤 했다.
약간은 찜찜해진 채, 남편의 말을 수긍하는 것으로 상황은 마무리될 때가 많았다.
기분이 태도가 되면 안 된다는 걸 알게 된 건 부끄럽지만 30대가 훌쩍 지나서였다. 누군가를 추억할 때 떠오르는 건 실력이 아니고 태도라는 글을 어느 책에서 읽으며 무릎을 탁 하고 쳤는데, 동시에 마음 한편이 욱신거렸다. 지난 세월의 내가 떠오른게지. 나는 좋은 태도를 가진 인간이 되고 싶어 졌다.
그 후, 화가 쉬어가는 방을 내 마음속에 만들었다. 꼭 표현해야 할 감정인지를 한 번 더 고민하기 위해서. '그때 괜히 그랬나?' 와같은 후회스러움 때문에 스스로 불편해지는 일을 막기 위해서.
세상에 거저 얻을 수 있는 건 없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남편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남편이 성격이 마냥 좋은 사람이라서, 물러 터진 인간이라서 화를 내지 않는 것이 아니라, 태도가 좋은 사람이었다.
화가 나는 상황에서도 타인이 말을 끊지 않는 것, 언성을 높이는 걸로 감정을 전달하지 않는 것, 미처 깨닫지 못한 상대의 입장도 있을 것이라는 걸 염두에 두는 것, 그리고 내가 느끼는 감정과 생각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는 것. 이 모든 것은 태도의 영역이었다.
그리고 그 태도는 어김없이 상대에게 전달되었는데, 남편이 화를 내지 않아도 문제가 ‘좋게 좋게’ 해결될 수 있었던 이유였던 것 같다.
어느 날, 일 문제가 제대로 처리되지 않아 화가 난 사람과 통화를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남편의 잘못이었다기 보단 상황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는데, 상대는 화가 나 있었다.
가만히 듣고만 있더라고. 알겠으니 조금 더 알아보겠다는 말만 남긴 채. 전화를 끊은 남편에게 물었다. “그렇게까지 성질내면 화나지 않아?” 남편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평소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거 잘 아니깐. 뭐가 잘 안 풀렸나 보지.” (소름)
다음 날, 어떻게 되었느냐고? 감정이 누그러질 때, 상황 파악도 보다 명쾌하게 되는 법. 머쓱해지는 건 남편이 아니라 상대방이었다. 남편은 사과를 받았고, 관계 전선엔 이상 무.
“화를 한번 참았을 때 그 후에 더 많은 경우의 수가 생겨. 계속 관계를 이어나갈지, 말지 그때 가서 선택해도 늦지 않아.”
성질대로, 성격대로 일을 해결하려는 것은 오직 ‘나’만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감정이 앞서게 되면 본질적인 문제보단 기분과 입장 따위가 훨씬 더 많이 표출되어 버리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 사람의 곁에 좋은 사람이 남아 있을 리 만무한 것이, ‘너만 성질 있냐?’라는 말을 듣기 딱 좋기 때문.
서른이 훌쩍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남편은 화를 못 내는 답답한 인간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할 말 하고 사는 시원한 성격이 아니었다는 것도.
남편이 자주 농담처럼 했던 말이 있다.
“너 그러다가 내가 성질 한 번 내면 풀썩하고 주저앉는다?” 정말 웃긴 말이라고 생각하며 콧방귀를 뿡 하고 뀌었는데, 남편은 아직 내게 본인의 성질머리를 보여주지 않은 것 같다.(무시무시한 인간..)
요즘은 그 말 대신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사람이 많이 좋아졌다?”는 말을 더 자주 듣는데, 의식적으로 남편의 행동을 따라 하고 나서부터, 태도에 대해 고민하게 되고 나서부터 였다.
사람이 많이 좋아진 덕분에 가장 큰 덕을 보는 건 어쨌거나 살 붙이고 사는 남편일 터.
좋은 태도로 살아가는 건 이래저래 손해 볼 일 없는 장사구나 싶어 진다.
오늘도 손이 끈적끈적하다는(손을 씻겨줬는데) 이유로, 얼굴에 로션을 발랐다는 이유로, 한번 불렀는데 재빠르게 대답해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성질을 부리는 네 살 두 아들을 보며 깊게 숨을 마셨다가 내쉰다. 아직은 느끼는 대로 분출하는데, 태도고 뭐고 자신의 감정이 가장 중요한 때라는 걸 아니깐.
대신 분명히 이야기해 주는 것이 있다.
"화부터 내선 해결되는 일은 없어. 어떻게 하고 싶은지 생각해서 다시 말해줘."라고.
입을 삐쭉대며 할 말을 생각하고 있는 아이를 보며 같이 성질 안 부린 내가 기특해 슬쩍 웃는다.
타고난 기질은 부모도 바꿔줄 순 없지만 삶을 살아가는 태도, 관점, 생각의 결 같은 것은 부모인 우리로부터 배워간다고 믿는다. 삶을 살아가는데 그러한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이미 겪어보아 잘 알고 있기도 하고.
그래서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부모의 행동, 일상을 대하는 감각과 타인을 대하는 태도 같은 것을.
잘 살자, 여보. 나만 잘 하면된 된다는 건 이제 잘 아니깐 하고 싶은 말은 그냥 넣어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