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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정민 Oct 23. 2020

기쁘고, 가쁜. 근사하고도 근심 가득한 일.

엄마의 태도를 익히는 중입니다. 


집 곳곳에 화분이 놓여있다. 

몬스테라, 스킨답서스, 선인장, 행복나무, 고무나무, 탈란시아, 페페들... 

처음 들였을 때 손바닥 만했던 것들이 무럭무럭 자라 몇 번이나 분갈이를 해주었다. 

작은 새 잎이 피어날 때마다 손가락 끝으로 몇 번이고 만져보는데, 마치 신생아의 머리카락을 만지고 있는 기분이랄까. 

새로이 태어나는 것들은 어쩌면 이렇게 연하고, 매끄럽고, 보드라운지. 

몬스테라의 넓적한 잎 사이에서 돌돌 말린 채 태어나는 새 잎을 보고 있으면 주먹을 꽉 쥔 채 태어났던 우리 아이들이 새삼 생각나기도 한다.

손가락만 한 잎 사이 새끼손톱보다 작은 잎이 매달려 있으면 그 앙증맞음에 괜히 엄마미소를 짓게 되기도 하고.      

이렇게 말하면 꽤나 능숙한 식물 집사라도 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식물만 있으면 저세상으로 보냈던 악명 높은 살 식마(?)였다. 

사면 죽이기 바쁜데, 이제 그만 좀 사지?라는 남편의 날카로운 지적에 움찔하다가도 소리 높여 항변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나름 알뜰살뜰 식물을 보살폈기 때문이었다.

 내팽겨둬서 죽은 게 아니라고. 얼마나 살뜰히 보살폈는데, 왜 죽는 거야? 

물도 자주 주고, 햇볕에도 내놔주고. 추울 땐 따뜻한 방에서 지낼 수 있게 옮기기도 하고, 잘 자라라고 영양제도 듬뿍 줬는데 왜! 도대체 왜 죽는 거냐고.     


십여 개의 식물들을 저 세상으로 보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식물을 집에 사 들이면서 알게 된 사실은 꽃집에서 일러준 방법대로 물을 주고, 햇볕을 쬐게 해 준다고 해서 잘 자라는 것만도 아니라는 것. 

꽃집 이모가 일러준 물 주는 간격이나 햇볕 양 같은 건 참고사항일 뿐.

우리 집의 일조량과 온도 같은 건 꽃집과 같을 수 없기에 식물이 잘 적응하고 있는 중인지를 살펴보아야 했었다. 

습기를 머금고 있는 화분에 물을 계속 주면 뿌리가 썩어버린다. 

식물이 햇볕으로부터 자라는 건 맞지만, 직사광선을 견디지 못하는 식물도 있다. 

이미 집 안에 익숙해져 버린 식물을 괜히 선심 쓴다고 바깥에 내놓으면, 하루도 채 가지 않아 시들시들거리다가 죽어버릴 수도 있다. 

아파 보인다고 영양제를 멋대로 주면 안 된다는 것도, 시름 거리다가 도 제 마음에 드는 환경을 만나면 이내 다시 생기를 찾을 수 있다는 것도 차츰 알게 되었다. 

제 몸보다 작은 화분도 식물에겐 좋지 않지만, 제 몸보다 화분이 너무 큰 경우에도 식물은 괴로워한다는 걸 예쁘다는 이유로 큰 화분에 옮겨 심은 홍콩 나무가 맥없이 픽 죽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여러 해 식물을 키우면서 아니 죽이면서 내가 깨달은 것은  햇볕과 온도, 바람과 물과 흙만큼 다정한 무관심 역시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동안 죽어버린 식물들은 지나친 나의 관심을 못 견뎠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확실하다. 


뿌리가 물을 흡수하는 동안을 무심히 기다려주면 좋았을걸 싶다. 

태양 아래 있으면 더 많은 볕을 쬘 수 있으니 식물이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온전히 나만의 착각이었다. 자꾸 만지고, 자주 옮겨 심으면서도 이것으로 인해 앓는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적당한 거리 두기. 관심을 두어야 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구분하고 나서부터, 잠깐 동안 충분한 애정 타임이 있었으면 또 그만큼 혼자 자라날 수 있는 무심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후부터, 

우리 집에 들인 식물들이 탈 없이 건강하게 자랐다. 

식물마다 마음에 들어하는 장소가 다르다는 걸 알게 된 후 함부로 자리를 옮기지 않는다. 흙과 잎의 상태를 보고 물 줄 때를 가늠하는데, 여전히 서툴긴 하지만 이전처럼 무작정이지는 않다.      



봄 볕이 너무 좋아서, 혹시 너도 좋아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바깥에 내놓았다가 그만 잎이 타 버린, 그래서 오랜 시간 시름시름 앓았던 아몬드 페페. 

지금은 생생하게 살아나 아몬드 알 같은 잎을 주렁주렁 매달고 탐스럽게 초록의 빛을 내뿜는 아몬드 페페를 바라보는 일을 좋아한다. 이렇게 앙증맞은 식물이 자칫 죽을 뻔했다니! 

상대가 원하는 게 무언 지는 생각지 않은 채, 잘 키워보고 싶다는 마음만 앞설 때. 

그 마음은 욕심이 되어 버리고 만다. 

욕심의 끝은 보나 마나 좌절과 실망, 슬픔과 아픔 같은 것만 남을 뿐이고. 


이 모든 행위가 꼭 아이를 기르는 일처럼 느껴져서, 아이를 기르면서 겪었던 크고 작은 시행착오들이 방울방울 떠올라서 기른다는 일의 무거움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알알이 예쁘게 자란 페페와 내 곁에 맴돌며 제 할 일을 하고 있는 두 아이. 

그리고 그것들을 돌봐주고, 가꿔주는 나.


 

키우는 인간으로 산다는 건 끊임없이 고민하고 성찰하는 일의 연속이라는 걸, 

먼저 자라는 인간이 되어야만 한다는 걸 또다시 인정하고야 만다.


적절한 관심과 다정한 무관심의 조화를 지켜줄 수 있으려면, 모자라는 건 채워주고 넘치는 건 덜어내줄 수 있으려면, 다정해야 하는 순간과 단호해야 할 때를 예민하게 느끼고 옳게 반응해 줄 수 있으려면, 낄 땐 끼고 빠질 땐 빠질 수 있는 시기적절한 인간이 되려면, 

열려 있어야겠구나. 

고집스러운 인간이어서는 곤란한 것이다.      


식물도 아이도 기르는 건 무척 어렵다고 투덜거리면서도 결국은 감탄으로 끝난다. 

아! 이토록 아름다운 일이 있다니. 탄성이 절로 나올 지경.

소중하고 귀한 이 생명들이 뒤틀리지 않도록, 곤경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줄 수 있는 적절한 인간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아 이토록 근사하기도, 또 근심 가득하기도 한 일이 또 어디 있을까. 

기쁘고 가쁜 일 사이에서 오늘도 나는 열려있자, 열려있자 주문을 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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