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예프리 yefree Oct 02. 2022

어쩌다 유럽 트램에서 소매치기범을 잡긴 잡았는데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 있다. 바로 28번 트램이다. 리스본의 주요한 관광지를 지나치기에 편리하게 도시의 구석구석을 구경할 수 있다. 나도 리스본까지 왔는데 이 트램을 안 타볼 수는 없었다. 다만 하도 소매치기가 많다는 얘기를 들어서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의 비장한 마음으로 만반의 준비를 했다. 내 손 하나 쉽게 넣을 수 없을 정도로 납작한 가방과 지퍼에는 옷핀을 연결해 쉽게 지퍼가 열리지 않도록 했다. 게다가 가방 위에 겉옷을 걸쳤다. 만에 하나 가방에 손을 대려면 옷을 먼저 들어 올려야 했기 때문에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았다.


역시 관광지의 성지답게 많은 인파가 이미 트램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방의 동전지갑에서 돈을 꺼내어 교통비를 지불하고 트램에 잽싸게 올라탔다. 잔돈을 주섬주섬 동전지갑에 다시 넣는데 뭔가 모를 싸한 시선이 여기저기서 느껴졌다. 아뿔싸 적에게 나의 본진을 훤히 들킨 느낌이었다. 게다가 트램 벽면에 “지금 당장 당신의 주머니를 조심하시오!”라는 경고 포스터를 보자, 정말 이곳이 괜히 악명 높은 트램이 아니구나 정신이 번쩍 들었다.


Photo by Tamara Bellis on Unsplash


그때 한 여성과 마주쳤다. 사람을 보고 이런 느낌을 받으면 실례인걸 알면서도 그 여자를 보자마자 온 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키는 157 정도 돼 보였으며 체구는 되게 왜소했다. 엄청나게 긴 머리카락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자기 얼굴의 절반을 가리는 커다랗고 암흑같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아, 이 사람이 소매치기구나’ 트램 안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그 여자만 색깔이 없는 느낌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여행의 설렘과 긴장으로 각양각색의 색깔을 띠는 반면 혼자 회색 처리된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여자의 시선은 잠깐이었지만 나의 동전지갑이 들은 가방을 향했던 것 같다. 너무 소름이 돋아서 재빠르게 그 여자를 피해 트램의 맨 뒷편으로 도망갔다. 확실히 앞보다 사람이 적어 쾌적했고, 오히려 탁 트인 통창 덕분에 리스본의 아름다운 거리들을 더욱 탐미하며 구경할 수 있었다. 바깥 풍경은 너무나도 아름다워 넋을 잃고 창밖에만 시선을 고정시키게 하는 힘이 있었다.


그때 아무 이유 없이 옆을 돌아봤다. 그 순간 진심으로 심장이 멎을 뻔했다. 아까 소매치기일 거라 확신했던 여자가 다른 관광객의 가방에서 몰래 카메라를 꺼내고 있었다. 주위를 살펴보니 나만 그 범죄현장을 목격한 듯했다. 그 여자는 내 시선을 알아채고 흠칫 놀라더니 아무 일 없는 척했다. 아마 그때 내 심장박동수를 재었더라면 200을 훌쩍 넘겼을 거다. 살인 현장도 아니고 고작 도둑질인데 뭘 그렇게 놀랬냐 하면 할 말이 없다. 하지만 한국에선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범죄를 실제 내 눈으로 보니 너무 무서웠다.


그 짧은 찰나에 수많은 생각이 들었다. 저 관광객에게 알려줘야 하나? 알려줬다가 저 소매치기범이 나한테 해코지라도 하면 어떡하지? 보통 한 사람이 아닌 여러 사람이 다인조로 구성해 소매치기를 한다던데, 누가 또 저 여자랑 한패 거리지? 발뺌을 하면 그땐 내가 어떻게 증명할 수 있지? 막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머릿속이 복잡해 터지려는 순간 그냥 입이 먼저 움직였다. 내 입은 그 관광객에게 조심하라고 방금 저 여자가 당신의 가방에서 카메라를 훔치려 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다시 생각해도 용감했던 순간이다. 그 패거리들한테 안 끌려가고 이렇게 잘 살아서 그때를 회상하고 있으니 말이다.


순간 트램 분위기가 싸해졌고, 관광객은 열린 가방의 지퍼를 닫으며 고맙다 했다. 그 소매치기범은 정말 아무 미동도 없이 트램 한구석에 서있다가 다음 정거장에서 황급히 내렸다. 그 사람이 내리기 전까지 그 짧은 찰나가 영겁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무슨 일이 또 언제 일어날지 모른다는 그 긴장감에 풍경이고 뭐고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도둑이 내리자 나에게 다시 한번 정말 감사하다며 인사하는 이를 보고 알려주길 잘했노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인생 처음 소매치기를 목격해 도둑을 잡은 용맹스런 한국인은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 …라고 끝맺으면 나도 정말 좋겠다.


Photo by Emil Kalibradov on Unsplash


하지만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 아직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마침 그 관광객도 내리고 빈자리가 생겨서 가서 앉았다. 순간 가방을 봤는데 지퍼가 활짝 열려 있었다. 끝이 날카로운 옷핀은 대롱대롱 위태롭게 매달려있었다. ‘뭐지? 내가 언제 지퍼를 열었었나? 분명 아까 교통비 지불하고 잔돈 넣고 지퍼까지 닫은 걸 확인했는데…’ 설마 설마 하는 불안감이 들었다. 얼른 동전지갑을 열어 안에 돈이 있는지부터 확인을 했는데, 텅 비었다. 내가 털린 거였다.

정말 귀신 곡할 노릇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옆으로 누가 가까이 왔다는 느낌조차 들지 않았다. 옆에 사람이 있긴 했으나 적어도 내 시야에선 그들은 내 돈을 훔치지 않았다. 게다가 가방의 지퍼를 열려면 내 가디건까지 들어 올려야 했는데 그런 느낌이 아예 없었다. 소매치기들은 분명 집에서 옷핀을 몰래 빠르게 분리하여 돈을 훔치는 방법을 연구하고 또 연습했을 것이다. 남 구하다 정작 내 돈이 털렸단 사실이 너무 어이가 없었다. 그 여자는 알고 있었을까? 내 돈을 먼저 훔치고 난 뒤 카메라를 훔쳤을까? 조심하라고 귀띔해주는 날 보며 무어라 생각했을까? 진실은 저 너머에 있다.


아무튼 리스본의 28번 트램을 탈 땐 정말 조심하시길 바란다. 바다에서 선원들을 홀렸던 세이렌의 아름다운 노래처럼, 트램 밖에는 우리의 시선을 홀랑 앗아가는 아름다운 풍경이 있다. 하지만 세이렌의 목소리에만 집중하다 목숨을 잃는 것처럼, 아름다운 풍경에만 넋을 잃다간 보기 좋게 소매치기범들의 타깃이 된다. 나는 다행히 20유로 정도였어서 속이 쓰리지만 봉사했다 셈 쳤다. 하지만 28번 트램에서 약 800유로 정도의 현금을 도둑맞았다는 한국인 얘기를 우연히 들었다. 어쩌면 귀신보다도 더 손재주가 좋은 소매치기범들이다. 미리 조심해서 나쁠게 전혀 없다. 이 나쁜 놈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