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빛엄마의, 엄마 영어방송이 들려요.
딸의 영어는 나의 영어와는 다르게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그 길을 찾기 위해 두 아이를 유치원에 보낸 후엔 집 앞 서점으로 달려갔다. 그때만 해도 아직 동네에 작은 서점이 있을 때인데 그 서점에서 영어 관련 코너의 책들을 한 권씩 읽어나갔다. 그때 읽었던 책들이" 영어의 바다에 빠트려라"(하광호 지음), "조기유학 절대로 보내지 마라"(송순호 지음), "영어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정찬용 지음) 등의 책이었고 하루에 한 권씩 읽었다. 그래도 이거다 하는 답을 얻지 못하다가 만난 책이 솔빛엄마의 "엄마, 영어방송이 들려요!" 였다. 가끔 책을 읽다 보면 작가와 내가 마치 거울을 바라보듯 똑같은 눈으로 서로를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는데 이 책이 그랬다. 그녀 역시 나와 같은 고민을 했고 고민 끝에 얻은 결론은 영어도 우리말처럼, 모국어를 습득하듯이 소리 먼저 노출이었다. 아이가 태어나서 자연스럽게 온갖 모국어의 소리에 노출되고 귀가 열려가면서 옹알이를 하고 아이의 그 옹알이를 엄마가 상대해 주면서 모국어가 완성되는 과정, 그 과정을 동일하게 영어에도 적용해주는 것. 유레카!! 그랬다. 내가 처음 만났던 원어민의 입에서 나온 영어들은 분명 내가 읽은 책에서 나오는 말들이었을 텐데 알아들을 수 없이 생경했던 것은 언어인 영어를 문자로만 공부한 것에 이유가 있었다. 듣고 이해하고 말을 해야 하는 언어를 귀는 막힌 상태에서 책으로만 읽었으니, 알아듣지 못했던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이치였다.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에 누군가 불을 확 켜버렸고 세상이 환해졌다. 길을 알았으니 남은 것은 실천뿐이었고 나는 심장이 방망이질 쳐서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영어가 모국어처럼 입에서 술술 나오게 하는데 필요한 기본 3000시간, 딸은 이제 여섯 살이고 3년이 지나도 겨우 아홉 살, 해 볼 만한 장기 프로젝트라고 나는 생각했다.
하루 3시간씩, 3년 동안 영어 소리 노출,
결심하고 시작하다
나는 대체로는 게으른 사람이지만 한 번 꽂히면 앞뒤 안재고 달려드는 성격이라, 바로 다음날부터 실행에 들어갔다. 동네서점처럼 당시에는 동네마다 비디오 대여점이 하나씩 있었는데 우리 동네에도 서점 바로 옆에 비디오 대여점이 있었다. 비디오 가게로 달려가서 아이들이 볼만한 비디오를 대여했다. 그때 주로 봤던 영화들이 라이언 킹 1,2 , 마틸다, 크리스마스 악몽, 페어런트 트랩, 홈 얼론, 타잔 등이었다. 매일매일 영화를 보다 보니 아이들이 아직 어려서 재미있게 볼 만한 영화가 한정돼있었는데 afkn(한국에 주둔해 살고 있는 미군 가정을 위한 방송)에서 어린이를 위한 세서미 스트리트라는 티브이 프로가 있다는 것을 알고는 매일 녹화해서 틀어주었다. 블루 클루, 비트윈 더 라이온즈, 도라 더 익스플로러, 클리포드, 프랭클린 등등 요일마다 재미있는 애니메이션과 에피소드들, 어린이를 위한 인형극 등을 녹화하고 틀어주는 것이 나의 일상이 됐다. 딸이 여섯 살 , 연년생으로 태어난 둘째가 다섯 살 때였다. 다행스럽게도 두 아이는 영화보기를 즐겼고 딸은 늘 그림을 그리면서 놀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영화나 애니메이션을 틀어주었다. 이 방법이 될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내 심장은 여전히 뛰고 있었으나 일상에서 변한 것이라곤 아이들이 영어로만 만들어진 영상을 보는 것, 그것이 달라진 풍경이었다. 물론 영상만 본 것은 아니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한글책을 읽어주었듯이 영어책 듣는 것이 당연해서 영어책 듣기도 시작했다. 다행히 딸은 이미 동화스터디의 영어동화책으로 듣기를 하는 습관이 들어있었다. afkn의 세서미 스트리트를 녹화하고, 집 앞 비디오 대여점에서 아이가 좋아할 만한 영화를 대여하고 그 외에 나는 영어책 구입을 위해서 영어서점에 매일 출근했다. 영어서점은 근처에 없어서 버스를 타고 몇 블록을 나와야 했다. 키다리 영어 샵이라는 영어서점을 어떤 때는 일주일 내내 출근하다시피 한 적도 있었다.
또 다른 신세계, 영어서점
키다리 영어 샵에 처음 발을 들였던 날도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세상의 모든 영어책이 그곳 서점 서가에 꽂혀있었다. 진열대에 놓인 책들은 아름답고 이국적인 삽화로 날 유혹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재미있어 보이는 스토리북들이 가득가득 넘쳤다. 이 책은 아름답고 저 책은 유머가 넘쳐 보이고 또 저 책은 감동적일 것만 같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을 뒤적였다. 하지만 책의 가격은 만만하지 않았다. 특히나 딸에게 필요한 책은 원어민이 읽어주는 오디오가 딸려있는 책이어야 했는데 그렇게 세트로 파는 책들은 얇은 그림책 한 권도 만원 이상이 훌쩍 넘었다. 고르고 골라서 몇 권 구입하고 다른 책들은 제목을 메모했다. 밤에 아이들을 모두 재워놓고 나면 혹시나 좀 더 저렴하게 책을 파는 곳이 있는지 인터넷을 검색했다. 아끼고 검색하고 골랐으나 책 욕심이 많아서 우리 집은 일주일이면 두 번 이상 택배 아저씨가 영어책을 배달해줬다. 딸은 매일 영어책 듣기를 했기 때문에 책은 늘 모자랐다. 예전처럼 한 권을 여러 번 반복해서 듣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책을 계속 들었다. 얇은 스토리북을 듣기에는 그 물량에 한계가 있었다. 그러다가 챕터북을 알게 됐다. 얇은 갱지에 그림이 없는 이 페이퍼백들은 보통 그 시리즈가 기본 20권을 넘었다. 한 시리즈를 시작하면 적어도 한 달 정도는 듣기 책을 구입하는 것에 여유가 생겼다. 그렇게 딸은 하루 3시간의 영어 노출을 채워갔다. 3시간 중에 2시간 30분 이상은 영상을 봤고 나머지 30분에서 40분 정도를 영어책 듣기를 했다. 나는 그날그날의 영어 일지를 기록했다. 날짜와 요일을 쓰고 무슨 영화를 몇 분 봤고 어떤 영어책 듣기를 몇 분 했는지 기록했다. 3시간 채운 날은 홀가분했고 채우지 못한 날은 자기 전에 스토리북 하나라도 더 틀어줘서 시간을 채웠다. 그렇게 루틴으로 이어지던 어느 날 밤이었다. 영어책 듣기를 많이 하고 있었지만 잠자기 전에 우리말 책 읽어주는 것은 계속 하고 있었다. 두 아이는 자기 전 자신들이 원하는 책을 한 권씩 들고 오고 나는 그 책을 읽어주었다. 그날도 잠자리 동화책 읽어주는 시간이 됐고 두 아이가 책을 들고 뛰어 왔다. "엄마 오늘은 내가 책을 읽어줄게!!"라고 딸이 외치며 책을 들고 내 옆에 앉았다.
딸이 처음 읽은 영어책,
쉘 실버스타인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
딸이 들고 온 그 책은 결혼 전에 내가 가끔씩 보던 그림책으로 어른을 위한 동화 같은 책이다. 결혼하면서 어쩐 일인지 친정에 두지 않고 신혼집에 그 책을 가져왔었다. 아쉽게도 몇 번의 이사를 다니는 동안에 분실해서 지금은 없는 책이다. 딸은 표지에 그림을 보고 동화책이라 생각했고 자기가 읽어 주겠다며 들고 왔다. 그 책은 첫 장을 열면 그림과 함께 첫 줄은 한글, 둘째 줄은 영어, 셋째 줄은 독일어로 돼 있었다. 나는 당연히 딸이 한글을 읽어줄 거라고 생각했다. 딸은 착 앉아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이는 첫 페이지를 한글로 읽더니 페이지를 넘기는 것이 아니라 그 밑에 있는 영어를 읽었다. 그리고 심지어 그 밑에 있던 독일어도 영어식으로 맘대로 읽었다. 나는 누워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딸은 계속 읽어나갔다. 그냥 페이지에 글이 있으니 그게 한글이든 영어든 독일어든 상관없이 자연스럽게 읽고 있는 아이를 보며 내 심장이 미친 듯이 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후다닥 안방을 뛰어나가서 앤서니 브라운의 고릴라라는 영어 동화책을 가져왔다. 앤서니 브라운의 고릴라는 딸이 아주 많이 들었던 영어동화책중에 하나였다. 나는 딸에게 읽어보라고 했다. 책을 펼쳐 든 딸이 또박또박, 심지어 원어민이 읽어줄 때 들었던 오프닝 시그널 뮤직까지 읊조리며 읽어나갔다. 띠링띠리리 띠리리리링 띠리리리띠리리리 띠띳띠 한나 러브스 고릴라, 쉬 리드 북스 어바웃 고릴라스... 인토네이션과 억양도 거의 읽어주는 원어민과 같았다. 요즘 말로 대박이었다. 미쳤다. 물론 솔빛엄마의 책을 읽고 딸도 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한글을 깨칠 때와 똑같은 일이 일어나다니, 단지 여러 번 책 듣기만 했을 뿐인데 외워서 읽는 것이 아니고 글자를 보고 읽다니, 나는 아이가 영어를 읽는 것에만 감격한 것이 아니었다. 이 방법이 맞는구나, 맞아, 밤마다 한글 동화책을 읽어주었을 뿐인데 한글을 깨친 것처럼 한글 깨칠 때랑 똑같이 영어 글자를 듣기만으로 깨치는 것에 감격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소리 노출과 더불어 책을 읽어 가면 아이가 모국어를 하듯이 영어도 말을 하겠구나, 읽기만 하는 영어가 아닌 말하는 영어를 아이가 가질 수 있겠구나 또 한 번 확신이 들었다. 아무도 모르는 금광을 발견한 기분, 비밀이 가득한 코드의 한 페이지를 풀어낸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