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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간의 공부방시절을 끝내고상가 학원으로 나오다.

학원으로 확장이전

이젠 학원이다.


 7년을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 아니 단 하루를 빠졌었다. 둘째가 재수를 하고 수능을 보던 그날은 정발산 밑에 있는 절에서 하루 종일 절을 하느라 공부방을 오픈하지 않았다. 그날을 제외하고는 단 하루도 공부방을 열지 않은 날이 없었다. 오전 11시 30분 경이면 집을 나섰다. 그때는 혼자 모든 수업을 다 했어야 해서 밤 9시까지 수업을 했다. 늘 녹초가 돼서 퇴근했다. 수업이 없는 주말엔 거의 집안에 틀어박힌 채 나오지 않았다. 오직 집 공부방, 집 공부방만을 오가는 생활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힘든 줄을 몰랐다. 누구도 9시까지 수업을 하라고 하지 않았는데 그렇게 많이 수업을 했다. 전업으로 있다가 뒤늦게 일복이 터진 것인지도 모른다. 3분 거리에 있는 공부방인데도 11시 30분 경이면 집을 나섰다. 도착하면 공부방을 청소하고 12시엔 거의 상담을 했으며 본 수업은 1시에 시작됐다. 한 명 두 명 아이들이 뛰어오고 2시가 돼가면 아이들이 몰리는 시간이라 때론 긴장감이 돌았다. 한꺼번에 우르르 아이들이 들이닥칠 때도 있었다. 나는 아이들 중 누구도 수업 시작을 기다리게 하는 법이 없었다. 한꺼번에 몰려와도 아이들을 각각의 섹션으로 빠르게 배분했다. 나는 단 1초도 의자에 앉아있지 않고 이방 저 방을 날아다녔다. 32평, 그 공간 안에서  거의 만보 이상을 걸었다. 그럼에도 힘든 줄을 몰랐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때는 정말 미쳤었나 보다. 그래 미쳤던 시절이었다. 45세에 시작한 공부방이니 그때도 이미 젊지 않을 때였는데 어떻게 그렇게 미친 듯이 날아다녔는지 모르겠다. 나의 공부방은 7년 동안 한결같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블록의 맨 끝 구석에 있었지만 그 영향을 끼치는 원은 주변으로 크게 크게 지름을 늘려가며 뻗어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7년 동안 조용히 있던 집주인 할아버지가 집을 빼 달라고 했다. 정신없이 공부방을 하다가 그 말을 듣자, 그래 이제는 상가로 나가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가로 나가자, 이젠 공부방이 아닌 학원이다. 매일매일 같은 길을 오가며 좀 심심해질 판이었는데 잘 됐다. 다행히 나에겐 지난해에 구입해 놓은 초등학교 앞의 상가가 있었다. 때가 된 것이다.






은행이 빠져나간 초등학교 앞의 빈 상가


 물론 나도 늘 상가로 나오고 싶은 갈망이 있었다. 내가 나오고 싶은 상가 자리는 딱 한 군데가 있었는데 그곳은 바로 우리 동네 초등학교 앞 상가였다. 공부방이 있던 블록의 맨 앞 상가, 역시나 바로 집과는 3분 거리에 있는 상가였다. 하지만 그 상가 2층은 하나은행이 차지하고 있었고 나는 기대를 접어야 했다. 은행이 어디를 가겠는가? 그런데 은행이 다른 곳으로 가는 일이 벌어졌다. 하나은행이 외환은행과 합병을 하면서 다른 지점으로 이전해버린 것이다. 하나은행은 그 상가 2층의 70평의 공간을 쓰고 있었는데 그냥 텅 비워 놓은 채 다른 곳으로 가 버렸다. 공부방 수업을 마치고 나면 집으로 가기 전에 그 텅 빈 상가를 들렀다. 뻥 뚫린 70평의 공간은 나를 압도했다. 투명한 유리를 통해 상가를 들여다보며 이 상가의 주인이 누굴까 생각했다. 70평은 필요 없었다. 30평이면 충분했다. 나는 상가주인을 만나고 싶어서 동네 부동산에 문의했다. 그 상가는 하나은행이 주인으로 하나은행은 상가 70평을 통째로 공매로 던져놓고 이사를 갔다는 답변을 들었다.

공매라니, 그럼 이 상가의 주인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는 말인가? 공매가 뭔지는 전혀 알지 못했으나 상가의 주인이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은 확실했다. 아직 주인이 정해진 상가가 아니라면 내가 그 주인이 되지 말란 법이 없지 않은가? 나는 포털에 공매를 검색했다. 공매는 인터넷으로 응찰하는 것으로 과정도 간단해 보였다. 이건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할만하다고, 꼭 하리라고 혼자만의 다짐을 했다.







상가를 공매로 낙찰받다.


 70평의 상가를 공매로 낙찰받는 과정은 시간은 좀 걸렸지만 의외로 순탄했다. 사람들은 그 상가에 대해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큰손들이 관심을 갖기엔 규모가 작았고 그렇다고 개인이 덤비기엔 좀 부담스러운 애매한 물건이었다. 부동산 중개인들도 자신에게 수수료가 생기는 물건이 아니라서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다. 나 역시 공부방을 하면서 언젠가는 학교 앞 상가로 나가 학원을 열리라는 목표가 없었다면 전혀 관심을 가질 일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자리에 영원히 붙박이로 있을 것 같던 은행이 이사를 가버리고 덩그러니 남은 그 70평의 빈 공간은 나를 유혹하고 또 유혹했다. 빈 상가의 유리문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안을 보며 이미 그 안에서 수업을 하고 있는 나와 아이들의 모습을 상상했다. 공부방 수업이 끝난 후라 몸은 녹초가 됐지만 상가 앞을 떠나지를 못했다. 9시가 넘은 상가 2층은 모든 상점의 문이 닫혀서 어두컴컴했다. 컴컴한 복도에서 이 공간이 내 것이 되기를 간절히 원했다. 하나은행은 그 상가를 공매물건에 올리고 취소하고를 여러 번 반복했고 취소돼서 물건이 목록에서 사라지는 날엔 이미 다른 사람이 상가를 구입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낭패감이 들기도 했다. 그러다가 물건은 다시 목록에 올라왔다. 한 차례 유찰이 되고 나는 바로 응찰하기로 결심했다. 역시나 아직은 누구에게도 말을 하지 않은 상태로 덥석 응찰했고 응찰금액의 10프로를 입금했다. 공매의 응찰 기간은 일주일인데 마지막 날, 그날은 추석을 맞아 남편이랑 시가에 다녀오는 날이었다. 두 아이는 뒷좌석에서 자고 있었고 나는 남편에게 상가 얘기를 했다. 그간의 과정을 설명하며 남편의 표정을 살폈다. 운전을 하는 남편의 얼굴이 뭐라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놀라움과 어이없음과 뭔가 두려움까지도 보이는 표정으로 남편은 한숨을 쉬었다. 평생을 안정된 직장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남편은 변화가 부담스러운 사람이었고 나는 늘 뭔가 일을 저지르는 사람인 편인데 이번에도 아무 상의 없이 큰 건을 하나 저지른 것이었다. 사건을 저지르고 뒷감당을 좀 부탁한다는 협박성의 멘트를 날리는 것이 나의 역할이었다. 남편은 말이 없었다. 말이 없다는 것은 일종의 60프로는 긍정이란 뜻이었다. 집에 도착해서 그 밤에 남편과 함께 상가를 보러 갔다. 물론 남편도 그 상가를 알고 있었다. 집 앞의 상가이고 하나은행이 얼마 전까지 영업을 하고 있던 곳이라 당연히 알고 있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자신이랑은 아무 관계가 없었는데 이제 성큼 자기 앞에 떨어진 숙제가 돼버린 상가였다. 그런 상가를 남편이 유심히 보더니 표정이 조금씩 밝아졌다. 초등학교 앞 큰 길가 전면상가 2층, 뒤로는 3000세대의 아파트를 끼고 있고 집과도 가깝다, 은행이 사용했던 터라 깔끔하고 밝았다. 밝아진 남편의 표정을 보며 나는 속으로 됐다를 외쳤다. 그리고 이틀 후 응찰 결과가 났고 나는 상가의 낙찰자가 됐다. 






블록의 맨 끝 공부방에서 블록의 맨 앞 상가로 나오다.



 상가를 낙찰받고도 해야 할 많은 일이 있었다. 잔금을 치르고 철거를 하는 과정이 남아 있었다. 8월에 시작된 공매 과정은 12월 초에나 끝났다. 70평의 모든 상가를 쓰기가 부담스러워서 일부만 나의 학원으로 인테리어를 하고 남은 공간은 임차인을 들였다. 그리고 해를 넘겨 3월에 아이들을 데리고 상가로 나왔다. 이사 가는 사실을 알리고 싶어서 아파트 몇 개 단지의 게시판에 다시 한번 홍보물을 붙였다. 공부방으로 나갈 때 한 번, 그리고 학원으로 이전하며 한 번, 7년 동안 단 두 번의 홍보물을 붙인 셈이다.

학원으로 이전하며 붙였던 홍보물, 7년 동안 두개의 홍보물을 붙였다.


상가로 나오는 것을 결정하고 나니 또다시 할 일이 산더미였다. 공부방 시절엔 이름도 간판도 없었지만 학원은 그렇지 않았다. 학원의 이름을 만들어야 했고 공부방과는 다른 양식으로 교육청에 등록해야 했고 그 외에 크고 작고 소소하고 중요한 많은 일들을 해야 했다. 엄마들에게 3번에 걸친 안내문을 발송했다. 상가로 이전한다고 하니 격려와 축하를 보내준 엄마들도 많았지만 거리가 멀어진다는 이유로 그 외 다른 이유로 그만두는 아이들이 생겨났다. 갑자기 그만두는 아이들이 생겨나니 당혹감이 들었다. 누군가는 상가는 전쟁터라고도 했다. 바쁘지만 흥분되고 기대감에 찼던 마음이 조금씩 흔들렸다. 내가 맞는 결정을 내렸는지 모르겠고 걱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누구에게도 이런 이야기를 맘껏 털어놓지 못했다. 내일은 내가 해결해야 했다. 그때 나는 학원장들이 모이는 카페에서 칼럼을 쓰고 있고 학원 마케팅 코치를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바로  상담을 의뢰했다. 처음으로 엄마들이 아닌 전문가에게 나의 공부방에 대한 이야기, 운영철학 , 영어학습법에 대한 나의 신념, 학원으로 이전하는 문제들에 대해 3시간이 넘게 미친 듯이 쏟아냈다. 그 코치는 게시판에 붙일 홍보문의 멘트를 잡아주었고 내가 쏟아낸 말들을 정리해서 돌려주었다. 그리고 한마디, 원장님, 블로그를 시작하세요!! 블로그 꼭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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