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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리자고의 자리 Apr 17. 2024

지극한 사랑이 한 일.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소설에서도 언급된 ‘그 도시의 학살에 대한 책’을 낸 이후, 한강이 쓴 글을 보고 있자면 한편의 우화가 떠오른다. 부처의 전생에 있었던 이야기를 모은 '자카타'에 실린 어느 나라의 왕에 대한 이야기다.

 어느 날 왕의 품에 매에 쫓기는 비둘기가 날아든다. 비둘기를 도와주기로 결심한 왕에게 매가 날아와 말한다.

 “왕이시여, 그 비둘기는 나와 내 가족들의 저녁거리이니 돌려주십시오. 돌려주지 않는다면 저희 가족들은 끼니를 걸러 배고픔의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자 왕은 매에게 비둘기만큼의 자신의 살을 내어줄테니 비둘기를 살려달라고 말하고, 매는 그것을 받아들인다. 왕은 우선 자신의 오른쪽 다리를 베어 비둘기가 놓여있는 저울 반대편에 올려놓지만, 저울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자 왕은 자신의 왼다리의 살을 한 덩이 베어 저울에 올려놓으나 역시 저울은 움직이지 않는다. 마침내 뭔가를 깨달은 왕이 저울 위로 올라가자 그제서야 저울의 균형이 맞춰진다는 이야기.

 이 이야기를 보면서 한강을 떠올린 건 한강이라는 작가가 소설을 통해 하려는 일이 위와 크게 다르지 않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녀가 무엇에 대한 소설을 쓰느냐에 따라 한강의 반대편에 올려져있는 것이 달라지며, 왕이 아닌 한명의 소설가라는 것이 다를 뿐, 한강이 소설을 쓰는 일과 저울 반대편에 있는 존재를 살리기 위해 스스로 저울에 올라가는 일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이 소설은 제주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한강이 또 한 번 자신을 저울 위에 올려놓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한강에게 있어 소설을 쓰는 행위가 왕이 비둘기를 위해 저울에 올라가는 것과 같다는 이 글의 주장을 받아들인다고 하면 자연스레 한 가지 질문이 생긴다.

 ‘왜 한강은 굳이 그들의 겪어야했던 고통과 죽음과 고문과 학살의 세계로 나아갔는가?’ 라는 질문이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때, 이 질문에 답하길 요구받은 적이 있다. 

 ‘한강은 소설가이고 소설을 쓴다는 것은 결국 스스로가 삶의 주인공인 '책임'의 세계로 나아가는 행위이다. 한강 역시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위로하는 방식으로써 소설가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그러했을 것이다. 이렇듯 책임지는 과정을 기록하는 것은 소설이라는 근대적 예술 장르가 아름다움을 형성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식이다.’ 라는 답변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실 관계가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나는 이 답변에 대해 아직까지 조금의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다. 내 대답이 한강의 소설이 지닌 ‘소설’이라는 형식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은 맞지만 ‘작별하지 않는다’라는 소설이 지닌 아름다움에 직접적으로 닿아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부끄러움과는 별개로 소설을 읽으며 나는 한강이라는 사람의 마음을 진심으로 걱정하였다. 소설가로서의 책임을 다한다는 명분만으로 감당하기엔 한강이 들여다보는 고통의 크기라는 것이 도저히 한 명의 사람이 감당할 만 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 수많은 고통, 슬픔, 두려움, 폭력, 학살, 죽음들을 온전히 견디도록 하고, 그 견딤의 결과로 세상에 나온 소설들을 아름답다고 말하며 더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써주길 바라는 나는 무엇인가라는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이런 고민을 친구에게 말하자 친구는 인간 한강은 슬퍼할지라도, 작가 한강은 나의 고민에 고마워할 것이라는 큰 위로의 말을 해주었으나, 안타깝게도 그것이 내 고민에 대한 온전한 답변이 되어주지는 못했다.

 좋은 답보다 좋은 질문이 중요하다는 말이 있다. 실제로 ‘왜 한강은 굳이 그들의 겪어야했던 고통과 죽음과 고문과 학살의 세계로 나아갔는가?’ 라는 좋은 질문에 대한 식상하기 그지없는 이전의 답변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역시나 친구의 좋은 질문을 통해서였다.  ‘왜 한강은 이 소설을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빈다.’라고 이야기했는가?’가 그것이다. 그 질문에 대해 성실하게 답변하는 과정에서 지금까지 풀리지 않았던 고민들이 해결되었다.

 지금에야 명확해진것이나 만약 내가 앞에서 말한 대로 소설을 쓴다든가, 타인의 고통을 들여다보는 등의 행위가 한강이 작가로서 감당해야 하는 책임의 층위에서 작동하는 것이었다면 한강의 소설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 너머의 세계로 나아가고, 귀신과 이야기하며, 수십 년이 지나버린 이야기와 작별하지 않을 수 있는, 그러니까 '기적'을 만들어내는 힘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것도 아닌 ‘지극한 사랑’일 수 밖에는 없다고 나는 말하고자 한다. 

 경하가 죽음에 닿아있는 몸을 이끌고 한 마리 새를 살리기 위해 서울에서 제주로 가는 일이나, 분명히 죽었을터인 아미와 서울의 병원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을 인선과 함께 '삶과 죽음의 경계 너머'에서 이야기하는 일이나, 정심이 평생을 걸고 오빠를 찾은 일이나, 누구보다 엄마를 몰랐다는 인선이 어떻게든 엄마를 이해하려는 일. 나아가 그 수많은 고통, 슬픔, 두려움, 폭력, 학살, 죽음들을 기꺼이 들여다보게 하고, 그것에 지지 않고 다만 묵묵히 써내려가게 하는 힘, 쓰고나서 보니 차라리 기적에 가까워 보이는 일들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모두 '지극한 사랑'이었음을.

 이 지점에 다다르니 ‘이 소설을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빈다.’라는 말을 굳이 띠지에 넣은 한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제주에서 자행되었던 학살을 통해 그들이 우리에게 보여 주려했던 것들. 그러니까 폭력과 고통과 죽음이  아닌 그것을 넘어서려 노력했던 정심과 경하와, 인선과 아미 사이에 깃들어 있는 지극한 사랑을 봐달라는 말을 전하고 싶던 한강의 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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