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슈퍼미고의 '슈퍼목표', 드디어 마주하다
지금까지 길고 긴 여정을 통해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무의식,
즉 ‘슈퍼목표’의 실체를 파헤쳐 보았다.
그리고 어릴 적의 상처, 반복된 선택, 숨겨진 기질,
연극 속 인물의 초목표까지.
이 모든 조각들이
어떻게 우리의 삶의 방향을 결정짓는지도 이야기했다.
이제 이쯤 되면,
필자-슈퍼미고의 슈퍼목표가 궁금하지 않은가?
도대체 무엇이길래 이렇게 '슈퍼목표'를 외치며
이 긴 여정을 함께 가려 하는가.
이번 화에서는 좀 더 개인적이고 디테일한
나의 관점으로 다시 돌아와
슈퍼목표를 설명해보고자 한다.
솔직히 말하면,
나 스스로의 슈퍼목표를 명확히 정의한 것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수많은 배우들과 씨름하며 캐릭터들의 '초목표'와
또 그들의 내면 깊숙한 곳에 숨겨진
자신의 '슈퍼목표'를 찾아주는 데 열중했고,
앞서 언급했듯이
안톤 체홉의 『갈매기』는 나의 주 교재였다.
지극히 자기 중심적인,
유명한 배우 엄마를 둔 뜨레쁠레프의 인정 욕구,
자식의 감정에 무관심하고 기능적으로만 존재하는
불완전한 부모의 가정에서 자란
마샤의 그림자 욕망을 파헤치고 이해하며,
배우들의 연기 깊이가 달라짐을 확신했고,
또 배우 자신들의 슈퍼목표를 발견하면서
인생을 대하는 태도가
더 긍정적으로 변화되는 것에 희열을 느꼈다.
그러다 어느 날,
한 배우에게
슈퍼목표를 찾아오라는 과제를 내주었을 때였다.
그런데 좀처럼 자신의 '한 줄'을 찾지 못하고 헤매고 있었다.
우리는 그 친구의 먼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삶을 더듬으며
무의식의 한 줄을 찾아 헤맸다.
하지만 아무리 들춰도
딱 떨어지는 한 문장이 나오지 않았다.
그 친구가 답답했는지, 문득 나에게 물었다.
"선생님의 슈퍼목표 한 줄은 뭐예요?"
“흠... 나의 한 줄은...”
순간, 뒷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그렇게 배우들을 가르치며 인물의 초목표를 강조하고,
배우의 인생을 재정립해주기 위해
그들의 슈퍼목표를 찾아주려 노력했는데,
정작 나는,
‘내가 왜 이 일을 계속하고 있는지’
‘무엇이 나를 움직이고 있는지’
깊이 들여다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이토록 단순하고도 근본적인 질문이라니.
순간, 피식 웃음이 났다.
그 순간부터 '나의 한 줄- 슈퍼목표'를 찾아
가장 최초의 기억부터 더듬어오기 시작했다.
– 잊혀진 나의 조각 복원하기
사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모든 인생을 다 기억하지 못한다.
마치 자동차의 블랙박스가
특별한 이벤트들을 따로 기록에 저장하듯,
우리의 기억도 먼 과거부터 삭제되어 오면서
대부분이 소실되었고
심지어 어떠한 기억이 정말 나의 기억인지
혹은 조작된 기억인지조차 확실하지 않은 경우도 많다.
그리고 그나마 남아 있는 오랜 기억들은
아마도 나에게 특별했던, 의미 있는, 잊을 수 없는
그 무언가의 이벤트들일 것이다.
연기를 가르칠 때
내가 인물의 전 인생을 다 뒤져서 찾아오라고 얘기하면,
“선생님, 몇 십 년 살아온 인물의 인생을 어떻게 다 분석해요?”
라며 어려움을 토로한다.
하지만 내가 몇 십 년을 살았다 할지라도
우리의 뇌는 자동삭제 장치가 있어
불필요한 기억들은 대부분 삭제되었고,
실제 내 기억 속을 뒤지면
얼마 남지 않는 조각의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배우가 나이가 몇이든 한 인물을 준비할 때,
'마치 나처럼'
과거를 상상하고 창조하고 분석하며 조작하는 것이 가능하다.
마치 컴퓨터 파일 정리할 때
조각 모음 하듯이 말이다.
그리고
조각을 모아보면 사실 얼마 되지 않는다.
나는 나 자신을 마치 배우가 캐릭터를 분석하듯,
나의 최초 기억부터 더듬기 시작했고
집요하게 파고들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의 기억, 학창 시절의 사건들,
나를 기쁘게 했던 순간과 불편하게 했던 순간들,
심지어 연애 시절의 기억까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과거의 나를
되짚으며 질문을 던졌다.
나는 어떤 아이였나?
나는 무엇을 좋아했었나?
나는 왜 그때 화가 났을까?
나는 왜 그게 아무렇지도 않았을까?
다른 사람들은 나를 주로 어떻게 평가했지?
나는 언제 불편하고, 언제 편안함을 느꼈지?
나는 왜 이 길을 선택했을까?
나는 왜 계속 그 일을 반복할까?
이러한 질문을 바탕으로
하나의 공통된 슈퍼미고의 기질과 성향을 발견했다.
바로 '착한 슈퍼미고'.
4화에서도 밝혔듯이
나는 이타적인 성향이 강했고 성격이 온순했으며 착했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늘 인기가 많았고
친구들이나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을 좋아하며
어딜 가나 모임의 주축이 되기도 한다.
화를 잘 내지 못했고 분쟁이나 갈등을 무지 싫어한다.
그래서 항상 주변 지인이나 친구들에게
'착하다'라는 소리를 많이 듣고 살았다.
그런데 그런 태도는 때때로
나 자신의 욕구나 감정을 미뤄두는 습관을 만들기도 했다.
‘착함’이라는 이름 아래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을 말하지 못할 때도 많았다.
한때 나는 돈 버는 재주가 없다고 생각했다.
마땅한 노동을 해놓고도 돈 달라는 소리가 정말 입에서 안 떨어졌고,
연기를 가르치면서도
학생들이 경제적으로 조금이라도 힘든 내색을 하면
돈을 받지 않거나 과감히 할인을 해주며
나중에 더 크게 갚으라고 얘기한다.
그렇게 운영을 하다 보니 운영하는 액팅 스튜디오도
사실 강사들이 나보다 돈을 더 벌어가는 경우도 허다하고,
장학이나 할인 혜택도 버는 수입에 비해 크게 쏘다 보니
막상 마진 계산을 해보면 별로 남는 게 없다.
그렇다고 돈에 관심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한동안 부동산 공부에 꽂혀서 나름 목돈을 번 적이 있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고,
부동산을 통해 만난 인연들과도 오래 가지 못했다.
그리고 부동산에 올인하면 돈을 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고
좋은 스승도 만났지만
크게 흥미나 욕심이 생기지 않았다.
반면, 서울에서 남양주 진접까지 왕복 3시간이 넘는 거리를
내 개인 시급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는 돈을 받으면서도
놓치지 않고 가는 내 자신을 보며
사실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교수의 명예나 타이틀이 좋은 것일까?
그렇다면 왜 교수가 되기 위해 더 노력하지는 않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잠시 뒤에 밝혀질 것이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단서가 기억이 났다.
바로 어린 시절,
엄마가 사주셨던 위인전 전집을 읽고 또 읽었던 기억이다.
저번 화에서 나는 책을 좋아했었다고 얘기한 바 있다.
그런데 기억을 더듬어보니 소설을 좋아했고,
더 어린 시절을 더듬어가니
위인전이 너무 재미있어서
김유신 장군, 헬렌켈러, 에디슨, 유관순, 강감찬 장군을 읽으며 존경했고
세종대왕의 위대한 업적에 한글에 자긍심을 느꼈다.
위인전을 읽을 때마다 가슴이 설레었고,
그들의 업적을 따라가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이렇게도 반문해볼까?
어릴 땐 위인전 좋아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또 다른 나를 마주해보자.
초등학교 때 반의 한 친구가 교실에 토를 한 적이 있었다.
다른 친구들은 모두 역겨운 표정으로
순식간에 모두 그 친구를 피했다.
매우 민망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나는 스스로 교실 뒤로 가서 휴지와 쓰레받이를 가져와
그 친구의 토를 치우고 닦아주었다.
토가 손에 묻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 친구가 얼마나 민망하고 속상할지가 먼저 느껴졌다.
그리고 그 친구는 울면서 고맙다고 말했다.
또 반에서 왕따를 당한 친구가 있었다.
항상 거짓말을 일삼던 친구였기에
여학생들 전체가 그 친구 하나를 두고 왕따를 시켰다.
그때 주저하지 않고 나는 그 친구를 막아섰고
그 많은 친구들에게 훈계하듯 상황을 종료시켰다.
그 친구의 거짓말은 나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소수인 친구가 다수의 무리에게 당하는 꼴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혹시 나의 MBTI가 짐작이 가시는가?
ENFJ. 웃기게도 정의로운 사회운동가이다.
정치를 했어야 하나하고 웃음이 나오기도 하지만,
그 정도로 정의 앞에선
사실 평소보다 화가 많이 나는 편이다.
이 정도면 기질과 성향이 착하다고 얘기해도 무방할 듯 하다.
그럼 도대체 나의 한 줄은 무엇일까?
착하게 살자?아니다. '착하게 살자'라고 노력한 적은 없다.
그냥 나를 위한 것보다 남을 위한 것이 편할 뿐이다.
그럼 남을 위해 살자?
그것도 아니다.
난 그리 박애정신이나 봉사정신이 뛰어난 사람은 아니기에..
그리고
꿈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다.
앞에서 잠시 접어둔 이야기를 해보자.
3시간을 왕복하며 강의를 다니는 이유?
이번에 대학 겸임교원 강의 우수 평가에 선발되어 상을 받았다.
교수로서도 나는 학생들에게 인기가 좋다.
나는 4학년 졸업생들 마지막 수업에 항상 케이크를 준비하고
졸업 이벤트를 준비해준다.
대학을 다녔을 때 1학년 때는 모두들 관심을 가져주지만
막상 4학년이 되면 관심 밖이어서 쓸쓸히 졸업했던 기억이 있어,
졸업하는 녀석들이 진심으로 사회에 나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나름대로 준비하는 작은 이벤트이다.
매번 교수가 케이크 들고
깜짝 이벤트를 해주는 것이 쑥스럽기도 하지만,
매년 자신들의 졸업을 진심으로 축하해준다며
눈물을 흘리는 제자들의 마지막 모습이 눈에 아른거려
나만의 시그니처 전통처럼 이어지고 있다.
이미 학교에선 선배들로부터 소문도 나 있어서
이제는 4학년들 녀석들이 은근히 기대를 한다는 얘기까지 들려온다.
이게 나의 슈퍼목표의 가장 완벽한 단서다.
그렇다. 나는 누군가에게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좋아한다.
누군가가 나의 선한 행동으로 변화되는 것이 좋다.
나의 무의식의 한줄 - 슈퍼목표는
"선한 영향력을 가지자"
이거였다.
뭔가 좀 작의적인 것 같기도 하고,
뻔한 문장처럼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이 한 줄은,
분명 나의 무의식을 관통하는 가장 지배적인 슈퍼목표였다.
누군가와 식당에 가면 나는 늘 말한다.
“너 먹고 싶은 거 아무거나 시켜.”
우리 다섯 살 딸에게도 묻는다.
“지금, 오늘 행복하냐고?”
피곤하고 힘든 일인 걸 알면서도 나는 자꾸 모임을 주선한다.
최근에는 딸 유치원 친구들 가족까지 불러 30명 가까이 모였고,
그 모임에서도 나는 또 이벤트를 준비했다.
사람들이 웃고, 좋아하고, 행복해하는 그 장면을 보면
이상하게도 피곤함보다 활력이 먼저 찾아온다.
멋모르고 배우의 꿈을 꿨고,
그저 무의식에 이끌려 연기의 길을 걸었고,
그렇게 20년 넘게 제자들을 가르쳐왔다.
그런데 이제야 그 모든 것에 이름을 붙일 수 있게 된 것 같다.
돈을 버는 것보다,
왕복 3시간을 달려서라도
제자들의 변화와 성장을 목도하는 시간이 더 좋다.
“선생님은 연기보다는 인생을 가르쳐주시는 것 같아요.”
그 말 한 줄이 내게는 충분했다.
내가 가장 행복해하는 일.
아니, 힘들어도 지치지 않고 계속 반복하게 되는 일.
단지 '착하게 살자'가 아닌
타인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그건 바로 **‘누군가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일’**이었다.
나는 '교육'의 정의를 이렇게 말한다.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이 더 진취적으로 살 수 있도록
그 사람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
그래서 그 사람이
조금 더 편안해지고, 조금 더 행복해지고,
결국은 더 나은 방향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
그 모든 과정이 나에겐 단지 ‘일’이 아니었다.
그것이 바로 나의 슈퍼목표였고, 삶의 이유였다.
그렇게 나의 무의식을 관통하는 슈퍼목표를 알아차리자
많은 것들이 풀렸다.
내가 왜 그렇게 살아왔는지도,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도 선명해졌다.
그리고 지금,
브런치 작가로서의 이 여정을 시작하게 된 것도,
결국은 그 슈퍼목표의 연장선 위에 있다.

(자신의 슈퍼목표를 삶의 진취적 동력으로 만드는 이야기도
앞으로 해볼 것이니 기대하시라^^..)
지금까지는 나의 여정을 중심으로 슈퍼목표의 실체를 탐구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타인의 이야기’를 꺼내보려 한다.
왜 어떤 사람은 수많은 기회를 두고도 자꾸 포기할까?
왜 어떤 배우는 천재적인 재능에도 불구하고 늘 불안에 시달릴까?
왜 어떤 사람은 계속 그 일에 집착할까?
나는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반대 슈퍼목표, 그림자 욕망, 변화의 순간을 발견했다.
9화에서는 실제 제자들의 사례를 통해,
슈퍼목표가 어떻게 우리의 삶을 무의식적으로 끌고 가는지,
그리고 어떻게 치유와 전환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