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안 하고 싶지 않아

폭우 속 빠이의 어느 카페에서

by 안녕씨
비 내리기 전 뽀송뽀송한 카페



잠시 쉬어갈 계획이었다. 근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빗줄기는 점차 굵어졌다. 잠시가 꽤 긴 시간으로 변모했다. 그 세 시간 남짓의 이야기다.



비가 잠잠해진 직후 카페


노천카페였다. 친자연적이라고 해야 할까. 바로 옆에 대나무가 보였다. 손 닿을 거리라고 해도 될 만큼 가까웠다. 시원한 바람이 나뭇잎과 부딪혀 경쾌한 소리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삼십 분 넘게 땡볕을 자전거를 타고 달린 직후, 앉은 카페의 풍경은 꽤 운치가 있었다.



이 집의 인기 메뉴를 주문했다. 머쉬룸 토스트와 당근 주스. 다소 낯선 비주얼이지만 검정과 보라의 강렬한 색감의 머쉬룸 토스트는 한 입 먹을 때마다 아쉬움을 남기는 한 마디로 기억날 것 같은 맛이었다. 여기에 생당근을 갈아 만든 당근 주스는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조화를 이뤘다. 그렇게 모처럼 평화로운 다소 이른 점심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머쉬룸 토스트


이 평화로움을 깬 건 갑자기 내린 거친 빗줄기였다. 점원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그들은 피해에 취약한 지역의 테이블에 앉았던 고객들을 안전지대로 이동시켰다. 손님이 떠난 테이블엔 빗물이 흥건히 고이기 시작했다. 그다음 빗물을 모을 주둥이를 곳곳에 놓았고, 그러는 사이 가게는 암전이 됐다. 점원들은 테이블마다 불 밝힌 촛불을 하나씩 올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 상황이 익숙하다는 듯이 이 모든 것들을 서두르는 기색 없이 침착하게 해 나갔다.


그들과 다르게 동요하기 시작한 나는 등받이 없는 나무 의자에 앉아 이 상황을 지켜봤다. 더 이상 지켜볼 일이 없을 때 나는 비로소 내가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가 아니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 놓인 것이다.


카페에 가면 하는 일이 있다.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거나 차를 마시거나,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인터넷을 검색하는 일 등 말이다. 하지만 당시 나는 혼자였고, 주문한 음식은 이미 바닥을 드러냈고, 가지고 있는 건 와이파이에서만 터지는 약정 기간을 거의 다 채워가는 노후화된 스마트폰과 약간의 현금, 선글라스뿐이었다.




촛불에 의지해 내리는 빗줄기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멍 때리기를 시도한 셈이었다. 근데 그 조차 쉽지 않았다.

빗줄기를 보고 있노라니, 밖에 세워져 있는 렌탈한 내 자전거가 걱정됐다. 내 자전거는 무사할까. 빗물을 무엇으로 닦아내야 할까. 카페에 마른 수건을 부탁해볼까. 안 되면 티슈라도 빌려보자. 티슈로 닦아내면 물기가 다 마를까. 젖은 안장에 엉덩이가 닿으면... 불쾌할 텐데 걱정이 꼬리를 물면서 마치 축축한 엉덩이가 된 것마냥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를 굳이 애써서 떠올리고 있었다.




비오는 종로



한 바탕 걱정을 쏟아냈는데도 빗줄기는 약해질 기미가 안 보였다. 시간이 참 느리게 흘렀다. 느려도 이렇게까지 느릴 수가 없었다. 괜히 울리지 않는 스마트폰을 만지작 거리길 수차례, 무엇인가를 하려고 애쓰는 내가 무엇인가 할 수 없음을 깨닫고 무안해서 또다시 애꿎은 스마트폰만 만지작거렸다.



그러는 사이 또 다른 걱정이 밀려왔다. 이번엔 이렇게 마냥 기다리는 게 최선일까였다. 만약 비가 안 멈춘다면. 기약 없이 기다리는 대신 한 시라도 빨리 바로 이 곳을 나가서 숙소로 돌아갈까. 기온이 떨어지면서 으슬으슬 한기도 느껴지는데 따뜻한 숙소에서 편안하게 쉬면 얼마나 좋을까. 거기엔 읽을 책도 있고 음악도 들을 수 있는데... 떠날까. 말까. 하다가 비까지 맞아가며 자전거를 타고 숙소까지 가다 감기라도 걸리면 어떡하지. 그렇게 생각이 전개되는데, 이십대로 보이는 여행자 무리가 더 이상의 무료함을 못 견디겠다 싶은지 자리를 떠났다. 떠나는 무리의 어수선한 소리를 들으며 대체 이 비는 언제 그칠까. 그치긴 하는 걸까. 나는 기다려야 하나. 떠나야 하나를 고민했고, 그 고민은 아침에 나오면서 일기예보를 챙기는 건데 하는 자책으로 이어졌다.




다른 테이블에도 관심을 가져봤다. 막 시작하는 연인일까. 여행하다 우연히 동행하게 된 남녀일까. 서먹서먹한 와중에도 서로를 향해 미소를 잃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만약 권태기의 커플이 이 상황을 겪게 된다면 어떤 모습일까를 상상해보기도 했다. 이 몹쓸 상상력은 이런 상황 속에서도 불평하지 않고, 이 상황을 온전히 즐길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바람으로 이어졌다. 그 바람은 지금까지도 못 만났는데 만날 수 있을까 하는 비관으로 곧 흘렀다. 쓸씁함이 더해졌다.



또 긴 시간이 흘렀다. 체감하기엔. 이번엔 짜증이 났다. 뭐 이렇게 순조롭지 않을까. 대체 얼마나 더 이 곳에 발이 묶여 있어야 할까. 빗물에 속수무책 노출된 자전거를 타고 갈 수 있을까. 짜증은 이 상황을 더 어둡게 채색하고 있었다



이 다크 한 생각을 전환해야 했다. 무엇인가를 먹기로 했다. 맛있는 음식은 행복이니까. 이번엔 아보카도 토스트와 따뜻한 차 한 잔을 주문했다. 따뜻한 차 한 잔이면 모든 근심 걱정이 녹는다고 하니까. 하지만 현실은 아니었다. 머쉬룸 토스트에 너무 흡족해서 기대치를 높게 가져설까. 배가 고프지 않아설까. 내 마음이 날카로워설까. 아보카도 토스트는 기대에 한참 못 미쳤고, 차도 새로운 걸 먹어본다고 도전했더니 영 입에 안 맞았다. 에잇.




소파였다면 기대기도 하고, 눕기도 할 텐데 등받이 없는 나무 의자는 내게 선택권을 주지 않았다. 테이블에 엎드려 잠을 청해보는데, 그 또한 내 생각대로 안됐다.




앞서 언급한 것들을 두어 차례 더 반복했을 무렵, 비는 그쳤고 나는 생각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두운 카페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나는 무심코 내뱉던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투정을 더 이상 안 하게 됐다.




태국, 빠이 비 오는 날 어느 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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