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여행을 하면,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 선다. 먹을까, 말까, 갈까, 말까, 할까, 말까, 살까, 말까, 말할까, 말까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소해 보이는 순간순간의 선택이 훗날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소환된다. 더 나아가 추억을 곱씹어보며 내 지난 선택을 성찰하게 한다. 가보지 않은 길을 섣불리 말할 순 없지만 또 내 선택이 모두 옳았던 건 아니지만 나는 수많은 선택을 했고, 그 선택들을 통해 나를 알게 됐고, 이전보다 더 좋은 선택을 내리게 됐다.무엇보다 여행을 좋아하게 됐다.
여행지에서의 사진, 포기할래?
2013년, 처음으로 혼자서 해외여행을 떠났다. 회사를 퇴사한 직후였다. 애정 했지만, 그 애정의 결과가 애정에 비례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쓰디쓴 교훈을 얻고서였다. 가장 빨리 떠날 수 있는 곳을 찾았다. 과거에 허우적대지 않으면서, 미래를 과도하게 걱정하지 않을 수 있는 내가 생각해낼 수 있는 최선의 해법이 여행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이틀 후 떠나는 타이베이 비행기를 결제했다.
코앞에 떨어진 여행을 앞두고, 서점을 찾았다. 서너 권의 대만 여행 책자를 스캔하듯 살폈다.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것들을 추리기 위해서였다. 영화 패왕별희를 떠올리며 경극을, 지친 나를 위한 온천 마을과 발마사지를,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배경이 된 지우펀을...... 내 여행의 윤곽이 서서히 그려지기 시작했다. 가는 법과 영업시간, 특이사항 등을 간단하게 메모했다.
출국일이 다가왔고, 비행기에 올랐다. 창가 자리에 앉아서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지상에서 보지 못할 고운 빛깔의 하늘을 내려다보면서 사진을 찍었다. 내가 기내에서 좋아하는 시간 중 하나이다. 근데 이상한 조짐이 느껴졌다. 알고 보니, 메모리 카드가 있어야 할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사진 백업을 하고, 제자리에 논다는 걸 깜박한 모양이었다. 사진을 포기할 것인가 vs. 포기하지 않을 것인가 이 여행에서 내가 최초로 결정을 내려야 하는 할 순간이었다. 어찌 보면 사소하기 짝이 없는 그러나 결코 쉽지 않은 고민을 안고, 대만을 향했다. 퇴사를 결정하기까지도 쉽지 않았지만, 이 즉흥적인 여행을 떠나기까지도 쉽지 않았지만, 여행지에서의 사진 역시 쉽게 결정할 수가 없었다. 쉬운 길, 즐거운 길, 나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걸 기대하고 있는 걸까.
승객들이 다 내리면 내려야지, 했던 것이 떠오르는 상념과 마주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나 보다. 비행기에 나만 덩그러니 남게 됐다. 어쩌면 혼자 여행이 조금은 자신이 없어서였을 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비행기는 멈췄고, 나는 이 비행기에서 내려야 했다. 그렇게 짐을 분주하게 챙기고 있는데, 승무원 무리와 마주쳤다. 서두르는 내게 승무원은 조금의 여유를 주고 싶었나 보다. "주인공은 마지막에 등장하니까요.”라는 따뜻한 멘트와 미소를 남겨줬다.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고, 어색했지만 그 미소는 경직된 내 마음을 조금 느슨하게 만들었다.
공항에서 출국 심사를 마치고, 숙소로 이동하기 전까지 나는 메모리카드를 살 것인가, 말 것인가를 또다시 고민했다. 그러다 메모리카드를 확인하지 않고 짐을 싼 나의 꼼꼼하지 못함을 책망했고, 또 그러다 그래도 첫 혼자 여행인데, 그 역사적인(?) 순간을 기록해야 하지 않을까, 하면서 메모리카드를 구매하는 쪽으로 마음의 추가 기울어졌다.
공항에서 지하철역으로 이동했다. 도중에 모녀의 도움을 받아, 교통카드를 발급받았다. 지하철에 올랐다. 그리고 내려야 할 곳에서 순조롭게 내렸다. 근데, 지하철 역에서 고작 3분 거리에 있는 숙소를 찾는데, 곤란을 겪게 됐다. 지도를 보고, 혼자 고군분투하다, 결국 행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근데 무슨 일일까, 지도를 본 사람들마다 각기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코앞의 숙소를 두고, 삼십여분 무거운 짐을 메고 왔다 갔다 했다. 삼십 분이 마치 세 시간 같았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졌다. 대만에 도착한 지 고작 2시간 만이었다. 그렇게 나는 내가 길치임을 인정하지 않으래야 않을 수 없게 됐다. 우여곡절 끝에 숙소를 찾았다. 얼마나 기쁘던지. 체크인을 하고, 리셉션 직원에게 메모리 카드를 구입할 수 있는 곳을 물었다. 다행히 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전자 상가가 있었다. 짐만 풀고, 바로 그곳으로 향했다. 메모리 카드를 구입했다. 한국에서라면 초등학생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대만이었고 혼자 여행 중이던 나는 이 별일 아닌 일에 성취감을 느꼈다. 또 한 번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불과 한 시간 전의 후회가 여행에 대한 기대감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있는 그대로 vs. 조금 꾸민
그렇게 첫 날을 보내고, 다음날이 되었다. 지금은 장소가 바꿔도 잘 자는 편이다. 그러나 그때의 나는 그러지 못했다. 새벽 5시 즈음이었을까, 선잠도 못 자고 뒤척 뒤척만 하다가 이럴 바에 일어나자, 가 돼 버렸다. 그렇게 나의 하루는 이례적으로 동틀 무렵부터 시작됐다. 샤워를 마치고 머리에 대충 타월을 두른 채 커몬룸 (Common Room)으로 향했다. '설마 이 시간에 나 말고는 사람이 있을까?' 내 좁은 판단에 의한 것이었다. 책장이 눈에 들어왔다. 살펴보기 시작했다. 대만에서 가장 오래된 호스텔답게 각국의 언어가 적힌 책들이 다수 있었다. 낯선 언어가 적힌 책을 신기하게 보다가 이문열 작가의 책을 발견하게 됐다. 이 우연이 어떤 인상을 남길까, 궁금한 마음에 읽어 보기로 했다. 그렇게 책을 읽고 있는데, 중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남자가 등장했다. 타인의 등장으로 타인의 시선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내 몰골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서둘러 내 방으로 돌아갈까, 아니면 그가 용건을 마치고 곧 떠나길 바라며 타인의 시선에서 조금 자유로운 척해볼까, 내적 갈등을 했다. 근데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그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 한국 분이시죠?
그는 스위스 호텔 학교에 재학 중인 나와 같은 비행기 일정으로 타이베이에 도착한 여행자였다. 다른 점은 그는 혼자 여행이 아주 능숙했고, 나는 처음이라는 점 그리고 그는 첫날과 마지막 날만 이 곳 숙소를, 나는 5일 모두를 선택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내 일정표를 보고선, 한 마디를 남겼다.
- 저와 여행 스타일이 전혀 안 맞네요
현지인 친구가 추천해준 일정들로 가득 찬 그의 일정표를 봤다. 진짜 하나도 겹치는 게 없었다. 그냥 웃었다. 어쨌든 대화의 끝에 그는 이전에 한 번도 듣지 못했던 그리고 그 이후에도 한 번도 듣지 못했던 말 - 혼자 여행하는 분, 멋지더라고요 - 을 남기고 체크 아웃을 했다.
그리고 마지막 날, 그를 다시 만나게 됐다. 숙소 투숙객과 아침을 먹으려고 호스텔을 나서는데, 그가 체크아웃을 하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같이 아침을 먹자고 권했지만 그는 서점에 들를 예정이라며 공항에서 보자고 했다. 나는 여행자와 아침을 먹고, 공항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막 공항에 도착한 그를 다시 만났다. 그는 내게 오라는 손짓을 했고, 나는 그의 뒤에 서 있는 두어 명을 제치고 그의 옆에 섰다. 그리고 우린 얘기를 나눴다. 사실 나는 듣는 입장에 가까웠다. 세계 여행을 꿈꾸던 일본 여행자가 아프리카에서 그 여행을 시작했는데, 아프리카가 생각 외로 지출이 크다는 걸 예상 못해서 아프리카에서 세계 여행의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 파리를 여행하다가 현지 여자 아이를 만나 공짜로 루브르 박물관을 구경했다는 이야기였다. 우와, 로맨틱하다, 우와 좋았겠다 말고는 리액션할 게 없었다. 출근하고 퇴근하고, 자기 전 내일은 오늘과 다른 생산적인 하루를 보내야지, 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한국 여자의 빈곤한 관심사가 여실히 드러난 것이었다.
그렇게 수속 밟을 때부터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여행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접하기 어려웠을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계속됐다. 새로운 세계였다. 내가 미처 알지 못하던. 그리고 그 얘기를 들으면서 그 미지의 세계가 궁금해졌다. 그가 내린 결정들이, 그 결정에 수반된 남다른 경험, 그로 인한 남다른 이해력이 부러웠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또 달랐나 보다. 취업 준비에 전념해야 할 시기, 남다른 그의 행보에 대한 주변의 염려 어린 시선이 고충이라고 했다. 시간 날 때마다 여행을 떠나고, 대만 여행을 마치고는 군대 가기 전까지 약 6개월을 일본 워킹 홀리데이 비자로 오전엔 호텔에서 일하고, 오후엔 어학을 배울 거라는 그였는데 말이다.
멈춤 vs. 나아감
도미토리의 또 다른 침대 주인은 한국 대학생이었다. 그녀는 워킹 홀리데이 비자로 타이베이를 찾았다. 별 다른 이변이 없다면 1년 간 체류할 예정이었다. 그러니까 장기간 머물 '진짜' 거주지를 구하기 전 임시 거처로 이 호스텔을 선택한 것이었다. 그녀는 영화 '말하지 않은 비밀'의 촬영지가 몰려 있다는 단수이를 내게 추천해줬다. 그렇게 내 리스트에 없던 장소 하나가 내게 다가왔다. 그날은 아침부터 계획대로 착착 풀려 갔다. 가려는 곳, 하려던 것, 먹으려고 했던 것을 다 소화하니까 오후 4시가량 됐다. 바로 숙소로 돌아가기엔 아쉬웠다. 다시 언제 올지 모르는 대만이었으니까. 그렇게 아침에 살짝 스치듯 들었던 단수이를 한 번 가볼까, 가 됐다. 다소 즉흥적으로. 가는 법은 몰랐지만 문제가 될 거 같진 않았다. 단수이 역에서 여행객으로 보이는 무리를 따라가 보면 의외로 쉽게 갈 수 있지 않을까, 계획이 보다 구체성을 띠기 시작했다. 거기에 성공한다면, 무임승차가 주는 혜택을 누릴 수 있을 것이고, 설령 그렇지 않을 경우에도, 나름의 경험이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더해졌다. 그렇게 단수이 역으로 향했다. 그리고 어렵지 않게 도착했다. 따라갈 사람을 물색했다. 두리번두리번. 커플이 눈에 띄었다. 따라갈까, 하다가 발걸음을 멈췄다. 카페에 가거나, 극장에 가거나, 노래방, VR 게임장, 오락실..... 커플이 갈 수 있는 곳은 너무나 많았기에 좀 더 관광객 같은 사람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그때 중년의 일본인 여성 둘이 보였다. 배낭도 메고 있었다. 내 눈에는 전형적인 관광객의 모습이었다. 그녀들을 따라갔다. 버스에 올랐고, 그녀들을 주시했다. 틈틈이 창밖을 구경했는데, 튜브, 수영복 파는 상점이 보였다. 내가 잘 찍었구나, 내심 흡족해했다. 그런데 그녀들이 같은 곳에서 내리지 않고, 한 정거장을 사이에 두고 개인행동을 했다. 거의 한 시간을 달린 끝이었다. 계획이 뒤틀린 것이었다. 이미 어둑어둑해진 낯선 곳에 내렸다. 화장실이 가고 싶었다. 하지만 화장실이 보이지 않았다. 화장실을 찾아야 하나, 더 늦어지기 전에 숙소로 돌아가야 하나, 여기가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바다는 보고 가야 하나 또다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 왔다. 이렇게 오게 된 거 바다라도 보고 돌아가기로 했다, 시야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바다를 향해 걸었다. 공중 화장실을 발견하면 좋겠다는 소박한 바람으로. 근데 보이는 건 험상궂은 아저씨 네댓 명이 무리를 지어 담배를 피우고 있는 모습이었다. 바로 뒤를 돌아 버스정거장으로 갔다. 바다를 포기하는 순간이었다. 버스에 올라 다시 한 시간을 달려서 원점인 단수이 역으로 돌아왔다. 만족스러웠던 하루의 끝에 만난 예상치 못한 상황에 나는 꽤 긴장을 했고, 체력을 소모했나 보다. 급 피로했다. 숙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렇게 지하철에 올라 숙소를 향해 가고 있는데, 막차 시간이 알고 싶어 졌다. 옆 자리에 앉은 승객에게 물었다.
- 혹시 막차 시간 아니?
- 잘 모르겠는데, 여행자라서
막차 시간을 확인하려다 혼자 대만으로 여행을 온 일본 여자 아이를 만나게 됐다. 그리고 같이 회전 관람차를 타러 가게 됐다. 종이에 회전 관람차를 그린 후에.
그렇게 나는 4박 5일의 대만 여행을 오락가락하는 감정으로 여행을 이어갔다. 분명 위기의 순간도 있었지만 위기를 극복하는 선택을 내렸고, 결과적으로 위기가 진짜 위기로 마무리되진 않았다. 오히려 위기 덕분에 소소한 일에 더 크게 웃었고, 위기 덕분에 여행의 추억이 더 풍성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