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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이런 X같은 우연, 여행

콘텐츠 마케터의 여행법

by 오늘
그렇다면 퇴사하겠습니다.

직장인 12년 차, 이직 두 달 차. 어제까지 열심히 해보겠다고 다짐한 내 입에서 더 이상 못 하겠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팀원들의 정리해고, 남은 사람들의 월급 삭감.

그렇게 나는 퇴사자가 되었다.


퇴사 한 달 후, 나는 이탈리아에 와 있다.

파워J인 ENFJ지만 이번만은 P가 된 기분. 퇴사도, 여행도

우연히 일어난 일이라 그런 걸까. 한창 일할 시간에 3만 보씩 걷고 있으니 '여행이 일'인 사람처럼 보고 듣고 먹는 모든 것들을 키워드로 각인시키는 중이다.


'요즘 대세는 볼트라고? 우버를 위협하는 신흥강자로

브랜딩 하고 있네.'

'이탈리아에서 커피로 살아남는 법이 궁금한데 도시마다

픽해둔 카페 브랜드 가봐야지.'


그렇다. 나는 지독한 콘텐츠 중독자다.

교육매거진 에디터에서 콘텐츠로 마케팅 하고 싶어서 홍보/PR 에이전시로 겁 없이 이직해 AE가 되었고 금융, 소비재,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디지털 마케팅을 대행하다가 내 브랜드를 가지고 싶어 스타트업 인하우스 마케터가 되었다.

꿈같은 두 달인지 두 달 같은 꿈인지 헷갈리지만.


그렇게 쉬고 싶을 때는 그만둘 수 없더니 아직 퇴사할 준비(돈도 마음도)가 안 된 '하필' 지금 퇴사라니.

이런 X같은 우연이 나를 여행으로 이끈 셈이다.



이런 x같은 우연, 첫 번째 여행은 '배 짼 돈'

돌이켜보면, 첫 번째 유럽여행을 계획하던 8년 전에도

꼭 지금처럼 'X같은 우연'이 작용했다.

매거진 취재팀장을 달고 스페셜 기사를 넘기고 쉬던 주말,

체한 것 같은 느낌에 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CT를 찍어도 이유를 못 찾겠다며 의사가 입원을 권했고 입원해 있던 4인실 병실 침대에서 맹장이 터졌다. 무려 병원에서 말이다.


초록색 위액까지 토해내던 나를 보고 옆침대 아줌마가 '맹장 같은데' 하던 말을 끝으로 나는 긴급수술을 위해 응급차에 실려 근처 대학병원으로 옮겨졌다. 드라마에서처럼 내 수술 침대를 끌고 흰 가운을 입은 의사 대여섯 명이 움직였고 '마취 시작합니다'라는 말이 희미해질 즈음 병실에서 눈을 떴다.


맹장이 터지면 복막염이 되어 개복수술을 해야 한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됐다. 입원은커녕, 병원 근처도 잘 가지 않는 내 오른쪽 배에는 3cm 정도 개복수술의 흔적이 생겼고,

아빠는 말없이 병원으로 찾아가 의사에게 의료과실에 대한 책임을 물었다. 평생 남에게 싫은 소리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는 아빠가 그렇게 성난 목소리로 의사를 불러대는 모습은 처음이라고 엄마가 나중에 말해주었다.

의사는 의료과실을 인정했고 병원에서는 수술비 일체와 정신적, 신체적 보상금을 건넸다.

눈치챘을까.

이 보상금이 내 첫 번째 유럽여행의 밑천이 된 것을.


이런 x같은 우연, 이번 여행은 '해고수당'

그로부터 8년 후. 직원만 200명 가까이 되는 스타트업에

인생 최고 연봉으로 스카웃되었다.

2022년 마지막으로 하고 싶던 버킷 리스트가 채워지던

꿈같던 순간, 심지어 입사일자도 전 회사에서 예상보다

빠르게 인수인계를 마쳐서 보름 정도 여유가 생겼다.

다시 돌아갈 직장이 있으니 안 갈 이유가 없었다.

설레는 맘으로 동유럽으로 떠났다.


이번 여행의 키워드는 '유럽의 크리스마스마켓'.

독일 뮌헨, 뉘른베르크, 드레스덴, 체코 프라하, 오스트리아 비엔나까지 크리스마스마켓이란 마켓은 전부 다 발도장을 찍었다. 이 여행은 겨울 즈음 시즌 2로 썰을 풀어볼 예정.


보름간 여행의 지출로 일하고자 하는 욕구가

차오른 상태로 시작한 첫 출근날.

스타트업 팀장으로서의 새로운 커리어를 열었다,

고 생각한 지 두 달 만에 보기 좋게 퇴사했다.

역시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처음 겪어보는 스타트업의 몰락(?)은 스펙터클했다.

갑작스런 정리해고 예고에 이어 잔류 인원들의 월급 삭감 통보까지 상상도 못 한 일들이 순식간에 몰아쳤다.


남아도 연봉이 20% 삭감된다는데 정리해고 명단에

들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좋아할 필요가 있을까.

정든 팀원들 중 누군가는 정리되고 누군가는 붙잡아야 되는 불편한 하루하루, 내 연봉은 전 직장보다 낮아지는 상황.

끝까지 노력했지만 회사측과 입장차가 좁혀지지 않았고

퇴사가 결정됐다.


회사가 어려워 퇴사하게 될 경우 그나마 좋은 점이 있다면

'경영 악화'로 인한 퇴사이기 때문에

실업급여 사유가 된다는 점이다. 특히 '임금 삭감'으로 인한 사유는 해고예고수당도 지급된다.

눈치챘을 거다.

이번 여행은 바로 이 해고수당 덕분이라는 것을.


일할 때는 여행을 꿈꾸고
여행할 때는 일을 생각하는
12년 차 콘텐츠 마케터

이번 여행으로 나를 이렇게 정의할 수 있었다.


나에게 여행의 이유는 설렘과 즐거움보다는

황당한 우연에 가까웠다.

이런 X같은 우연이 우연히 선물해 준 여행이라

되는 대로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로마에서 시작해서 남부인

소렌토, 나폴리, 포지타노, 아말피를 지나

피렌체, 피사, 베네치아, 밀라노가 있는 북부를 돌아

프랑스로.

총 12개 도시가 차곡차곡 쌓여 이 글의 목차가 되었다.

모쪼록 여행이 유일한 숨구멍인 나와 같은 직장인들에게

이 글이 여행에서 일감을 찾는다는

자그마한 핑계가 될 수 있다면 영광이겠다.



written by 오늘

12년 차 직장인이자 팀장(잠시 내려놓았다).

에디터 시절 버킷리스트였던 2주간의 유럽여행을 기점으로

'1년 1유럽'을 꾸준히 실천 중이다.

최근 스타트업을 굵고 짧게 겪으며

더 이상 미루지 않기로 했다.

여행과 직장 사이를 끊임없이 오고 가는 틈새여행을 통해

'오늘'부터 여행과 일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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