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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정 Apr 08. 2024

역시, 해 보길 잘했어

첫 대회 참가 후기

처음으로 출전하는 무용대회 당일, 토요일 아침에 느지막이 눈을 떴다.

다행히도 나의 대기시간은 금요일까지 근무를 끝낸 직장인에게 더없이 좋은 시간인 토요일 저녁이었다. 알람 없이 늦잠으로 피로를 풀고 점심까지 든든하게 챙겨 먹은 후  연습실로 향했다. 대회에 나갈 공연작품은 보통 3분 내외로 그리 길지 않지만, 마지막 점검이다 보니 호흡과 자세, 시선까지 신경 쓰느라 두어 번 만에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한국무용은 한번 공연이라도 할라 치면 챙길 짐이 많다. 한복치마를 풍성하게 해 줄 속치마가 2개, 가짜 머리와 비녀, 속두리까지 이것저것 합하니 양손 가득 둘러매야 한다. 긴장된 마음에 짐까지 잔뜩 들고 나니 대회에 나간다는 게 실감이 났다. 같은 대회에 참가하는 언니와 이동하는 차 안에서 편의점 김밥을 나눠 먹으면서 이른 저녁을 대신했다. 3월의 마지막날이라 한낮에는 봄날이었고, 가로수에 핀 벚꽃 덕분에 잠깐이지만 봄 소풍을 가는 기분이 들었다.

땀 내며 몸 풀고, 의상 점검


대회장 가는 길 여의도의 벚꽃. 대회가 아니라 놀러간다는 생각으로 긴장 떨치기



공지 시간보다 두 시간 일찍 도착한 아트센터에는 참가자와 가족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전통과 창작 한국무용, 현대무용, 발레까지 이어지는 릴레이 대회에 초등학생부터 대학생까지 참가 부분이 나뉘어 마치 무용 축제 같기도 했다. 대기하는 공간 한쪽에서 헤어와 메이크업을 끝내고, 참가자 명단을 확인해 보니 나는 신인부 두 번째 순서. 수 백명의 명단 가운데에 적힌 내 이름을 확인하니 조금씩 긴장감이 더해지기 시작했다.


"신인부 대기하겠습니다."


아, 이제 진짜 시작이구나.

시험 삼십 분 전에는 무대 옆 분장실에서 의상을 갈아입으며 스탠바이를 한다. 이제 버선을 신고, 머리 중앙에 올린 족두리에 걸리지 않게 한복을 갈아입고, 저고리 고름까지 매고 나니 정말 준비는 끝났다. 잠깐의 자투리 시간에도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자세를 잡으며 마지막 점검을 하는 첫 대회 참가자인 나. 지금까지 공연도 두어 번 해 봤지만 그것과는 다른 떨림이다. 3분 동안 혼자서 그 너른 무대를 채운다는 게 실감이 나질 않는다. 작년 여름부터 준비한 작품이니 족히 6개월은 연습한 춤인데 장소가 바뀌었다고 이렇게 떨리다니... 시간이 다가올수록 조금씩 심장소리가 커져갔다.


진행자를 따라 무대 뒤로 올라가 순서를 기다렸다. 아직 무대는 발레 경연이 치러지고 있었고, 객석에 앉은 심사위원과 사람들의 윤곽이 얼핏 보였다. 떨린다는 생각을 떨치려 기다리는 동안에는 무대 중앙을 표시한 테이프를 보고 동선을 미리 구상해 본다. 처음 서는 무대이니만큼 제때에 제 자리를 찾아서 서는 게 중요한데 각자 안무도 다르고 발걸음 수도 다르니 어느 파트에서 어떻게 이동할지 머릿속으로 먼저 그려보는 게 필요하다. 무대에서 우왕좌왕하는 것만큼은 피해야 한다. 일단 가운데를 잘 찾아서 서는 게 중요해!


"참가번호 1번-" 내 번호가 불리고, 흡-하고 호흡을 한 번 들이마시고 가운데를 향해 걸어 들어갔다. 잔걸음으로 무대 상수에 자리를 잡고 한 바퀴를 돌아 포즈를 잡고 서 있으면, 징 소리와 함께 음악이 시작된다. 고개를 돌려 정면을 보니 강렬한 조명 때문에 한 명, 한 명의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무대에 나 혼자 서 있다는 자각이 들자 한층 더 긴장감이 돌았다.

첫 시작은 여유로운 손짓으로 호흡과 함께 자세를 잡아야 하는데 그 시간이 얼마나 길게 느껴지던지. 1초가 1분인 것 같은 기분으로 춤을 추고 있자니 웃고 있는 입술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얼굴로 쏟아지는 조명 때문에 무대의 가운데 표시가 보이질 않아 당황하기도 했지만, 관객석을 기준으로 대략 위치를 가늠하며 자리를 잡아갔고 최대한 당황한 느낌은 안 보이려 애썼다.


그 시간 내가 기댈 곳은 오로지 음악이다. 한껏 음악에 집중하며 순서를 이어갔고, 그렇게 어찌어찌 삼 분을 채우고 있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한 가지, 떨리는 마음에도 순서는 잊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보통 공연을 준비할 때 '자다가 일어나도 툭 치면 춤이 나올 만큼' 연습하라고 한다. 단 하루의 공연이라도 몇 개월씩 연습하는 게 이해가 잘 안 됐는데 이렇게 긴장된 상황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사실 이곳에 오는 동안에도 걱정이 많았다. 전공자들 사이에서 창피만 당하는 게 아닐지, 혹은 조명 아래 머릿속이 백지가 되어 멈춰버리는 건 아닐지, 대회에 나가는 게 괜한 짓은 아닐지... 오랜 시간 홀에서만 연습했으니 대회라는 '경험'을 해보자는 처음의 동기는 어느새 다 잊고, 걱정거리만 머릿속에 가득 차 무대에 올랐던 것이다. 흔히 '도전에는 나이가 없다', '도전하는 자체가 아름답다'라고 말하곤 하지만 사실 아무것도 안 하는 게 평온한 삶이다. 아주 작은 도전도 피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다른 학생 참가자들처럼 입시에 필요한 것도 아니고, 나에게는 경험을 쌓기 위한 일이었지만 대회날이 다가올수록 부담감이 커진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막상 무대에 오르니, '이게 뭐지?' 싶을 정도로 심플했다. 

무대는 정말 아무 일 없이 평화로웠기 때문이다.


왜일까. 뭔가 모르게 마음의 장벽이 하나 깨진 기분이 드는 건.


온갖 걱정과 고민으로 가득한 '부정적인 말'은 오로지 내 머릿속에만 있었다. 음악도, 조명도 완벽했고 모두가 내가 잘 끝내기 위한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다른 참가자들도 나를 신경 쓰지 않는다. 각자의 무대에 집중할 뿐. 그냥 나는 내게 주어진 무대를 충실하게 다 쓰고 나오면 되는 거였다.


'단지 자신의 무대에 최선을 다하면 되는 거구나'

다시 대기실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으며 허무할 만큼 차분해진 마음이 되어 무대에서의 3분을 돌아보았다.  

중요한 순간, 아무도 나를 방해하지 않았다. 오로지 내 머릿속의 걱정만이 나를 괴롭힐 뿐이라는 사실을 마주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다른 사람보다 앞서는 경쟁이 아니라, 자신의 무대에 최선을 다하기만 하면 된다는 깨달음이었다.


'실체 없는 생각' 때문에 중요한 순간마다 얼마나 망설이며 살았던가. 진짜 중요한 건 '그냥 하는 것'이다. 오직 행동하고 시도하는 것만이 두려움에 맞서는 방법이라는 걸 이번 온몸으로 느낀 순간이었다.

(... 그렇지만 무대는 다음에도 떨릴 것 같다.)


그렇게 정리하고 나니 대회의 결과, 수상 여부는 부차적이었다. 이미 대회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경험을 얻었기에 더할 수 없이 마음이 가벼웠다. 진짜 경험은 이런 거구나. 그전까지 상상하지 못했던 생각과 감정을 느끼고, 다른 각도에서 나를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주는 것. 경험 그 자체로 이미 보상을 받았으니 수상의 결과는 보너스와 같을 것이다.


사실 익숙하지 않은 것은 모두 도전이다. 편하고 일상적인 것만 해도 충분히 살 수 있지만, 굳이 새로운 것을 시도해야 하는 이유는 이전까지 해보지 않은 것을 배울 수 있어서가 아닐까. 나만 혼자 즐기고 춤추는 것에서 다른 이에게 나를 내보이는 모험을 감수하지 않았더라면 알 수 없는 것들이다. 그래서 '감당할 수 있는 모험'을 해 보라는 거였구나.


다른 일도 그렇지 않을까 싶다. 어떤 분야든 누구나 도전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데, 지금까지 내가 먼저  온갖 추측과 고민으로 지레 겁을 먹고 있는 게 아니었을까. 

사는 동안 배움은 끝이 없다는데 무엇이 되었든 겁부터 내지 말자. 혹여 실패하더라고 그것이 경험으로 남을 테니까. 내 머릿속을 제외하면 너무도 고요했던 '3분의 무대'를 떠올리며, 내 안의 두려움을 조금씩 밀어내면서 작은 도전을 해보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고생한 하루, 하얗게 불태우고 야무지게 뒤풀이까지 마친 후 귀가했습니다~


+

결과는 상관 없다고 했지만...감사하게 상까지 받았네요.

역시 해보길 잘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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