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란 단어는 어쩐지 무료한 느낌을 준다. 아침에 졸린 눈으로 일어나 씻고, 옷을 갈아입고, 각자의 일터로 떠나 하루를 시작하는 직장인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월화수목금요일에는 매일 똑같은 곳으로 출근하기 때문에 점심시간마다 바뀌는 식당을 제외하면 머무는 장소도 같다. 그나마 주말이 되어야 평일과 다른 루트를 찍으며 변주가 생긴다. 사실 아침에 눈뜨면 해야 할 일이 있고, 가야 할 장소가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그만큼 안정적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뜻이니까. 일상이란 '예측가능'하기에 안정감을 주고, 그날의 할 일을 끝냈다는 것만으로 어느 정도의 만족감을 챙길 수 있다.
그러나 그게 전부일까. 할 일을 하면서 예측가능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잔잔한 호수와 같이 평화롭다. 오래 보고 있기엔 조금 지루하기도 하다. 그래서 호수보다는 바다로 향한다. 크고 작은 파도가 일어났다 사라지면서 색다름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나의 일상도 바다와 같은 다이내믹함으로 채워지길 바란다. 내게 주어진 일을 충실히 하는 가운데, 한편으로는 새로운 영역을 탐험할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일상이라는 무게에 짓눌리지 않을 수 있다고 늘 생각한다.
우연한 계기로 한국무용 수업을 들으면서 평소와 다른 파도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일주일에 한두 번 수업이 작은 출발점이었다. 아이가 걸음마를 배우듯 발 디딤새부터 새로이 배워야 했는데, 책상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는 게 익숙하던 사람이기에 무용은 그야말로 딴 세상이었다. 그렇게 호기심에 연습실에 발을 들였다가 언제 이렇게 시간을 흘렀을까 싶을 정도로 오랜동안 취미생활로 이어지고 있다. 겉으로 보기엔 내향형이지만 내면에는 꽤나 흥이 많은 사람이 아닐까. 그동안 나도 몰랐던 열정이 무용을 계기로 조금씩 꿈틀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연습실에 갈 때면 기분 좋은 떨림이 있다. 호흡과 함께 몸을 움직이고, 음악에 맞춰 춤을 출 때의 생생함이 좋다.
단순히 재미에서 그치지 않는다. 연습실에서 일어나는 일은, 땀 흘리고 집중하며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같은 동작을 몸에 익을 때까지 반복하고, 집중하지 않으면 음악을 놓치게 되니까 발 끝이 움직이는 곳에 정신을 잘 붙여두어야 한다. 지금, 현재에 몸과 마음을 집중해야 하는 게 춤이다. 어찌 보면 움직이는 명상과 같다. 그러니 나도 모르게 빠져들고, 더 잘하고 싶어지는 마음이 올라온다. 움직이는 동안 몸은 힘들지만 정신은 또렷해져 다시 또 다음을 기약하며 가방을 싸는 것이다.
어느새 춤은 연습실을 넘어, 나의 일상에도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첫째는 어디서나 바른 자세를 유지하려는 노력이다. 무심결에 거울을 통해 본 내 모습이 너무도 엉거주춤했고, 평소에 어떤 자세로 지내는지 짐작이 되었다. 허리는 굳고 목이 빠진 전형적인 '책상형 인간'의 모습을 보며, 지금까지 '바른 자세'가 무엇인지 신경 쓰지 않고 살았다는 걸 알았다. 지금까지 수십, 수만 번을 반복해 왔지만 바르게 걷고, 바르게 서고, 바르게 움직이는 일은 내가 의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것을 지탱할 수 있는 근육이 있어야 하기에 내 몸 관리의 시작은 바른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꾸준히 관리하고 있다.
둘째는 마음이 힘들 때 땀 흘리며 털어버리는 습관이다.
걷나 가, 뛰거나, 춤을 추거나 어느 것이든 상관없다.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면 복잡한 생각이 끊어진다. 그러니까 땀은 감정해소의 특요약 중 하나. 그때그때 쌓인 마음의 찌꺼기는 걷거나 뛰거나 춤을 추면서 해소하는 게 가장 빠른 방법이다. 퇴근 후 한창 춤추고 움직이며 땀을 내고 나면 가슴속까지 상쾌해지고, 그대로 수면까지 이어지곤 했다. 그렇기에 앞으로도 뭐가 됐든 나의 일상 루틴에서 규칙적인 운동으로 빠지지 않을 것이다.
또 다른 한 가지가 있다면 솔직한 감정 표현이다.
춤 속에는 즐겁고 기쁜 감정만 있는 것이 아니다. 깊은 슬픔이나 괴로움도 있고, 강인하고 강직함도 있다. 희로애락의 어떤 감정이든 재료가 되어 표현할 수 있는데 그것이 참 좋다. 보통 사회생활은 감정을 가면으로 숨기는 포커페이스가 필요하다. 그러다 보니 인간으로서 느끼는 여러 감정은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억눌리거나 소외되곤 한다. 부정적인 감정은 어차피 잊어버리는 게 좋지 않을까 싶지만, 그렇지 않다. 슬프거나 화나거나 분노하는 감정을 제대로 봐주는 게 나의 정신건강에 도움이 된다. 그렇지 않으면 응어리가 되어 나중에 더 큰 문제를 감당해야 하고, 그 뿌리를 알지 못해 컨트롤하지 못할 수도 있다. 지금까지 감정을 굳이 드러내지 않는 편이었는데, 무용을 하면서 그것이 정답이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풍부한 감정은 단점이 아니라 장점이 될 수 있고, 다양한 감정을 재료로 멋진 작품을 만들 수도 있다. 그것이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예술이니까. 나를 솔직하게 들여다보고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있도록 알려준 게 춤이다.
그것 외에 또 뭐가 있을까. 춤이 있는 일상, 책이 있는 일상, 글이 있는 일상...
인생 전체가 재밌으려면 되도록 일상에 재미 요소가 많아야 한다. 지금 하는 일이 즐겁고, 만나는 사람들이 유쾌하고, 여가 시간에 하는 활동이 의미 있으면 눈덩이처럼 만족감이 커질 테니까. ㅇㅇ이 있는 일상, 에 무엇을 채워 넣고 싶은지 생각하면서 주말 오후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