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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정 Jul 06. 2021

글은 나에게 보내는 메시지다.

글의 초안은 그 이야기를 당신 자신에게 말해주기 위한 것이다.
---Terry Pratchett 테리 프래쳇


연말이면 의례처럼 신년 다이어리를 준비합니다. 

교보문고에 늘어선 가판대에서 캐럴 음악과 번잡한 사람들 틈에서 샘플을 들춰봅니다. 밝은 색 표지에 일간 내지가 있는 양지사 노트를 고르는 편입니다. 1월이 되면 얼른 페이지를 채워야지, 하고 마음 먹지만 사실 열심히 일기를 쓰는 편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다이어리는 대략 3분의 1 정도를 채우고 일 년을 마무리하곤 합니다.


일기는 가장 부담이 없는 글입니다. 하루에 10분, 아니 5분이라도 정리하기엔 충분한 시간입니다. 

마감도 없고 평가도 없는 일이지만 그렇기에 뒷전으로 밀리기 쉽죠. 특별히 기록하고 싶은 일이 없다면 한 달 동안 펼치지 않은 때도 있다. 그럼에도 매년 다이어리를 준비하는 이유는 가끔이라도 써 놓은 그날의 감정과 생각을 다시 살펴보기 위해서입니다. 짧게 써진 문장일수록 핵심만 써 두었을 테니까요.


대체로 듬성듬성 인 일기장이 꽉 찼던 날도 있습니다. 

고등학교 수험생 시절, 매일 그날의 학습 기록을 썼습니다. 목표는 뚜렷한데 길은 보이지 않는 막막함에 5줄씩 하루의 학습량과 다짐을 적었습니다. 딱히 다를 것 없는 내용의 반복이었는데 왜 그리도 열심히 썼는지. 영어 국어는 실수를 줄이고, 수학은 더 분발하자는 끝맺음이 대부분이라 읽으면서 웃음도 새어납니다. 내일은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기 바라는 수험생의 마음이 기특했습니다. 대학교 3학년 때에도 꽤나 빡빡하게 채웠습니다. 학교 일정 외에도 동아리, 학회 등 하고 싶은 활동을 하느라 부지런히 다니던 시기. 동기부여를 위한 명언, 책이나 신문에서 보았던 글귀와 정보를 모아 빼곡히 정리해 두었습니다. 무엇이든 열심히 경험하고 다니던 이십 대의 열정이었습니다.


때때로 일기장만 쓰다가 작년에는 글쓰기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혼자 읽는 글이 아니고, 더 긴 호흡으로 내 생각을 구체적으로 꺼내보고 싶었습니다. 사회생활에서는 좀처럼 내 생각, 내 의견을 펼칠 기회가 많지 않습니다. 그런 이유에선지 하루 종일 많은 말을 하고 글을 썼어도 자려고 누우면 막상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꺼내지도 못한 기분이 들었달까요. 그래서 블로그 이웃님의 모집글을 보고 온라인 글쓰기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혼자서는 시작하고 이어 나가기 어려울 테니 약간의 수업비를 냈습니다. 돈을 지불하고, 마감일이 있으니 시작이 되었습니다.


자유주제로 일주일에 하나의 에세이를 제출합니다.

분량도, 주제도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쓰면 되는데 그런 자유가 더욱 어렵게 느껴졌습니다. A4 용지 1장을 무슨 내용으로 채울 것인가? 마음껏 내 이야기 좀 써보자고 신청했는데 막상 백지가 주어지니 무엇을 쓸지 떠오르지 않는 아이러니함을 마주했습니다. 업무 보고서는 수십 장도 넘게 작성하면서 말이죠. 그러다가 쓰려는 주제가 떠올라 첫 줄을 시작해도 마지막 끼지 문맥을 연결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럴 때 모임장의 코멘트가 도움이 되었습니다.


과제를 제출한 다음날이 되면 한 통의 메일이 도착합니다. 

매운 빨간펜이 아니라 온정의 빨간펜이 쓰여 있는 글쓰기 피드백입니다. 독설보다는 다독임에 가까운 코멘트. 독자의 입장에서 이해가 잘 안 되거나, 혹은 더 알고 싶은 부분을 표시하고 줄글로 읽은 사람의 의견이 달려 있습니다. 하이라이트로 '이 문장은 좋아요' 표시를 해 둔 메일을 보고 있으면 얼른 퇴고하고 싶은 의욕이 생깁니다. 이토록 정성스럽게 글을 읽고 리뷰를 남겨주는 사람이 있어 야근 후 졸린 중에도 한 문단을 쓰고 잠들곤 했습니다. 종종 글쓰기 모임에서 날 선 비평으로 의욕을 잃기도 한다는데 다행히 저의 경우는 정 반대였습니다.


그렇게 10편여의 에세이를 썼습니다. 한 편을 글을 3주 동안 퇴고하기도 했습니다. 

프로작가도 아닌데 너무 오래 붙들고 있는 게 아닌가도 싶었지만 고쳐쓰기를 통해 글과 생각을 곱씹고, 문장을 가다듬으며 글의 이음새가 나아졌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일주일마다 새 글을 쓴다지만 제 속도는 조금 느렸습니다. 마지막으로 제목까지 붙이고 나면 그럴듯한 글이 한편 완성됩니다. 글 한 편의 완성이 그렇게나 뿌듯할 줄 몰랐습니다.


글에 담고 싶던 주제는 '일상의 빛나는 순간들'입니다.

소소한 일상에서 건강과 행복, 내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반짝이는 순간을 문자로 옮겼습니다. 글이라고 하면 드라마틱한 경험담이나 성공, 러브 스토리면 좋겠다 싶었지만 내 삶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문장은 쓰는 사람을 투영할 뿐이기에 오랫동안 품어온 것들을 꺼내보았습니다. 자연, 추억, 산책, 여행, 계절, 운동 등 평소 생활에서 가까이하는 작은 일도 글감으로 충분했습니다. 특별할 것 없지만 항상 함께하는 일상의 순간들도 충분히 행복감을 주는 요소가 되었습니다. 


언어에는 힘이 있습니다.  '빛나는 순간들'을 쓴 이유는 빛나는 삶을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책에서 아름다운 문장을 발췌해서 필사를 하는 것처럼, 읽었을 때 마음이 따뜻해지고 힘이 나는 글을 쓰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결국은 글쓴이가 첫 번째 독자이자 열렬한 구독자입니다. 힘이 되고 응원이 되는 글 한편을 가장 먼저 나에게 선물하고 싶습니다. 쓰면 쓸수록 긍정과 충만함을 알아가는 글쓴이가 되는 것이 제일의 목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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