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허리 숙여야 하는 농사일 때문이다. 집도 가깝고 일도 거들 겸 자주 시골에 가서 시간을 보냈다. 할머니는 저녁 늦게라도 손주가 배고프다 하면 야참을 챙겨주시는 다정함도 있지만 한 가지, 똑 부러지게 혼을 내실 때는 바로 식사 시간. 밥공기에 ‘밥 한 톨’도 남기지 말라는 말씀을 하도 자주 하셔서 지금까지도 밥그릇을 싹싹 비우는 게 습관이 됐다.
작디작은 쌀알 하나도 허투루 보이지 않을 만큼 손이 많이 쓰이는 게 농사일이다.
돌이켜보면 할머니는 느긋하게 쉬는 날이 없으셨다. 마당 한 편의 작은 텃밭에도 언제나 파, 배추, 깻잎, 상추가 있고 화단의 꽃도 빌 틈이 없을 만큼 시골집은 언제나 식물들이 무성했다. 어릴 때는 ‘농부의 손은 마술인가’ 싶었지만 어른이 되어 화초를 키우며 알았다. 할머니의 텃밭은 할머니의 마음이 다 들어간 것이었다. 집에 있는 화분도 물이 적당한지, 해가 적당한지매일 들여다보고 시간을 들이지 않으면 거저 되는 것은 없다. 무언가를 돌보는 일은 쉽지 않다.
어깨너머 배운 농사의 스킬은 별다른 게 없다.
어린 꼬맹이의 눈에도 할머니가 아침에 나가서 해질 때까지 밭 매고 고랑 매는 일에 왕도는 없어 보였다. 그저 손길 한번 더 가는 정성이 전부였다. 그러면 하루 이틀은 변화가 없지만, 몇 개월이 쌓이면 어느새 풍성한 농작물을 거두는 날이 온다. 정성이란 그런 꾸준한 시간과 관심의 투자인 셈이다.
초등학생의 나는 시골에 가면 할머니 옆을 따라다녔다. 할머니가 밭을 매는 동안에는 나도 질세라 옆에서 고추를 따고, 양파도 캐고, 추수를 했다. 땅에 물을 주고 잡초를 캐면서 ‘잘 먹고 쑥쑥 커라’고 말하셨다. 식물에게 말을 걸고 잘 크도록 바라는 마음, 곡식을 주는 땅을 소중히 여기는 할머니의 마음이 어렴풋이나마 전해져 왔다. 그래서인지 시골 논밭에서 나는 것들은 알알이 크기가 크고 맛이 좋았다.
농부가 곡식을 키우는 태도는 해가 내리쬐나 비바람이 부나 변함이 없다. 어릴 때부터 할머니 옆에서 땅을 밟으며 배운 것은 밥 한 톨도 귀하게 여기고, 꾸준히 정성을 기울일 줄 아는 농부의 잔잔한 마음 씀씀이다.
나의 땅과 곡식은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오늘처럼 퇴근 후 묵묵하게 시간을 들여 문장을 고르는 걸 보면, 글을 짓는 일이 나의 농사가 아닐까 싶다. 씨앗처럼 조그맣게 떠오른 문장 하나를 잡고 있다가 거기에 담고 싶은 이야기를 이리저리 주물러서 하나의 글로 엮어낸다. 어울리는 제목을 붙이고 브런치에서 발행을 누르면 쌀 한 가마니 수확한 듯 뿌듯하다.
돌다리도 두드리는 성격만큼 글도 일필휘지에 쓰지 못한다. 한 페이지를 쓰려면 일주일이 꼬박 걸리는지도 모른다. 여러 번의 퇴고를 거치고 다듬어가며 한 페이지를 쓰고 블로그에 올리기 시작했다. 온라인 글쓰기 모임에도 참가하다 보니 하나 둘 글이 쌓였다.
목차를 짜지 않고 그때의 떠오르는 것들을 모았는데 다시 훑어보니 제목은 달라도 메시지는 하나였다. 치유, 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글은 거울처럼 나를 비춰주었다. 치유는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방식을 설명할 수 있었다.
삼 남매의 첫째인 나는 연년생 동생 때문에 어릴 때부터 엄마와 심리적인 거리감이 있었다. 둘째에게 엄마를 빼앗겼다는 충격일지도 모르겠다. 다섯 살 즈음 경험한 엄마와 단절감을 느낀 이후 줄곧 '혼자'라는 생각으로 지냈다.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기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내성적인 성격에 힘든 일 어려운 일을 속으로 삼키며 해결하려다 보니 속병이 나기도 했다. 또 스무 살부터 독립해서 지내다 보니 어떻게든 스스로를 지키고 다독여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혼자서라도 힘든 나를 다독이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살아올 수 없었을 것이다. 문장들 사이에서 그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쓰러지면 일으켜가면서 살아온 마음의 흔적이 보였다.
할머니가 땅을 돌보며 곡식을 키웠듯 나는 내 마음밭을 돌보며 성장해 왔다. 어쩌면 내 글은 나에게 보내는 응원이다. 그것이 어딘가로 흘러가 누군가에게 닿는다면, 그 사람에게도 작은 위로와 힘이 되었으면 한다.
희로애락 사이에서 고군분투하며 살아가는 오늘의 기록이 내일을 위한 고른 토양이 되기를 바라며, 한 문장씩 정성 들여 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