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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and Jan 17. 2024

“고드름도 보고”

 테니스는 코트 바닥 상태가 중요하다. 그중에서도 흙으로 되어 있는 클레이코트는 눈, 비가 와 땅이 질어지거나 눈이 쌓이면 운동을 못하게 된다. 굳이 따져본다면 비 보다 눈이 더 좋지 않다. 비는 땅에 스며들어 금방 물이 빠지거나 해가 나면 마르는데, 눈은 스며들기보다 쌓여있어 치워주지 않으면 그 상태로 얼어서 나중에도 못 치게 된다. 그리고 치웠다가도 또 내리면 또 치워야 해서 손도 많이 가고, 성가시다. 눈이 내리는 날이면 그만큼 춥다는 말인데, 추위와 맞서가며 눈을 치워야 해 더 고역이다. 

 저 아침부터 눈이 많이 와 테니스를 치는 대신 코트에 쌓인 눈을 치웠다. 예보는 오후나 되어서야 온다고 했는데 아침부터 내린 것이다. 할 수 없이 모인 회원들끼리 한 차례 눈을 치우고 찐빵 같은 간식을 먹고 있는데, 곧이어 또 눈이 내렸다. 치운 만큼 또 쌓여 결국 다시 나가서 눈을 치웠다. 운동은 못하고 눈만 치우다가 가게 생겼는데 한 회원이 혼잣말로 “고드름도 보고, 호빵도 먹고, 그래도 좋네” 하면서 휴게실 지붕 처마에 매달린 고드름에 휴대 전화를 대고 찍는다. “와 이런 고드름은 진짜 오랜만에 보네요.” 오랜만에 봐 반갑다는 듯이. 운동을 못한 데 대한 자기 위안은 아니었고, 마치 오늘 아침은 ‘허탕칠 것’을 알기라도 했던 듯 평온하게 그 상황 자체를 즐기고 있었다. 이어 그 회원이 말했다. “와이프 꼬셔서 앞산이나 가야겠다. 눈 오면 산 참 예쁘잖아.”   

 ‘님도 보고 뽕도 따고.’라는 말이 있다. 일석이조, 일거양득처럼 좋은 일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공통적인 전제가 있다면 의도대로 하고자 하는 일을 하는 것이 기본이고 거기에다 뜻밖의 좋은 일이 따라오는 것이다.

 비슷하게 들리는 말이지만, “고드름도 보고 호빵도 먹고”는 달랐다. 애초에 테니스를 칠 줄 알았는데, 테니스를 못치게 된 것부터 의도한 대로 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상황이 예상한 대로 흘러가지 않으면 당황하기 마련이고, 당혹스러움은 불쾌감이 되고 그에 대한 기분은 썩 좋진 않기에, 시작부터 계획과 다르게 흘러가는 것에 대해 일석이조라고 하는 경우는 흔치 않기 때문이다. 

 내가 유독 그런 사람이다. 당장 내일 날씨도 모르고, 자고 일어나서 몸 상태도 모를진대, 나를 둘러싼 일들과 벌어지는 상황을 통제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 예상이 엇나가면 뭘 해도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 별 탈 없이 잘 지나가고, “고드름도 보고 호빵도 먹고”와 같은 상황이 되어도, 이미 그전에 예상한 대로 흘러가지 못한 것에 대해 속이 상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좋아진’ 것에 대한 감각도 떨어지는 것이다. 아무리 예쁜 고드름이 열려도, 맛있는 찐빵을 먹어도 내 안에 갇혀 뜻하지 않은 행운들이 찾아와도 못 누리는 거다.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을 통제하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오만한 탓이다. 
  그 회원과 같이 호빵도 먹고 눈도 치우고 처마에 매달린 고드름도 봤던 나다. 같은 상황에서 겸허하게 주어진 것에 오히려 감사하지만, 난 주어진 것은 쳐다보지도 않고, 생각대로 안 된, 그것도 이미 지나간 가고 바꿀 수 없는 것에 대해 곱씹고 안타까워한다.      

 다행인 건 하루의 끝에서 그 회원의 말이 여운으로 남아 울린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나야말로 ‘고드름도 보고, 호빵도 먹고, 나는 거기에 더해 그 회원의 말도 얻어간 일석삼조 같은 하루를 보낸 것이다. 


뜻대로 흘러가지 않아서 더 아름답고 배부른 것들을 알아차릴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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