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한 걸 다시 들어보다가 한 단어에서 낯선 느낌이 들었다. 분명 뜻은 아는 단어였다.
그 말은 “암만해도”였다.
분명 그 당시에도 무슨 말인지 알고, 다시 들을 때도 알겠는데, 막상 글자로 옮겨놓으니 암만해도 어색했다. 써놓고 보니 표준어는 아닌 건 알겠는데, 암만해도 다른 말로 뭐라고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예상치 못하게 생긴 작은 혼돈이 재밌기도 하고 이왕 이렇게 된 거 생각해 내고 싶어서 한동안 기억을 끌어모으다가 결국 모르겠어서 찾아봤다. ‘암만해도’는 ‘아무래도’의 전라남도 방언이었다. ‘암만해도’를 ‘아무래도’로 바꿔서 써봤다. 분명 의미는 변하지 않는데, 뭔가 아주머니가 한 말맛이 살아나지 않는 것 같았다.
“암만해도 벅차지.” 물가가 올라 가능한 싼 곳을 찾아 돌아다닌다는 내용에서 나온 말이었는데, “아무래도 벅차지”라고 쓰니 덜 벅찬 느낌이었다. 물론 화면에서는 말한 대로 나가지만, 자막은 그 느낌을 따라가지 못했다. ‘암만해도’로 들었을 땐, 내가 장을 본 건 아니고 대파나 사과 가격이 그렇게 많이 오른 지도 몰랐지만, 그 느낌만큼은 알 것 같았는데 말이다.
소통할 때, 이런 경우에서 행복을 느꼈던 것 같다. 문장이나 단어를 보고는 정확히 모르겠는데, 어떤 느낌인지는 알 것 같을 때. 상대와 이어져 있다는 느낌이 들고 기뻤다. 엄밀히는 뭐라고 한지는 몰라도, 느낌이나 뜻은 뭔지 더 정확히 알겠을 때 소통의 공포에서 해방된다.
“뭔 말인지 알지?”를 많이 쓰던 때가 있었다. 당시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던 친구에게 습관적으로 썼었다. 그 친구의 공감 능력과 내 언어를 해석하는 능력을 믿기도 했지만, 구구절절 내 생각이나 마음을 전하기 힘들어서 어느 정도 말해 놓고, 무책임하게 이해를 맡기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면 그 친구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곰곰이 생각하다가 활짝 웃었고 “응, 뭔 말인지 알겠다.”라고 했다. 그 친구가 보였던 웃음이 아마 아주머니가 한 말을 듣고 생긴 내 웃음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찌저찌 마음에 잘 닿을 때 켜지는 웃음 버튼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