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우성 Apr 12. 2020

#6. 공든 탑이 무너지다

때로는 따스한 햇살이 최악의 결과를 초래하는 게 인생이다. 

 대한민국 학생이라면 응당 거쳐야 할 관문 중 하나인 대학 수학능력 평가. 항공기 운항 및 모든 크고 작은 공사가 중단 중단되는, 가히 대한민국이 가장 고요해지는 시간이다. 사회는 수능 성적을 통해 대학 입학 기준을 세우고 그 기준에 맞춰 학생을 줄 세운다. 그리고 학생들은 앞줄에 서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언론에서 아무리 블라인드 채용이니, 대학 간판의 중요성이 예전만 못하다고 떠들어 대지만, 여전히 대학은 등용문이자 기회의 밭이다. 그리고 이러한 대학을 가는 방법 중 제일이 수능이다. 수능 시험으로 그동안 쌓아 올린 세월을 보상받거나 좌절한다. 


 수능 전날부터 나는 부산하게 움직였다. 미리 공표된 학교에 찾아가 내 자리를 확인했다. 따뜻한 볕이 드는 창가 쪽 자리다. 걸상 오른쪽 구석 위에는 수험번호와 내 이름 석자가 반듯하게 프린팅 되어 붙여있었다. 미리 방문한 학생들은 의자와 걸상 높낮이를 파악하고자 이리저리 자리를 뜯어보고 있었는데, 나 또한 조금 더 편한 의자에서 시험을 보기 위해 여러 의자에 앉아보고, 마음에 드는 의자로 교체했다. 의자에는 이름표가 붙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사실 큰 의미가 있나 싶었지만 한 가지의 불편한 변수도 허락하지 않고자 하는 간절함의 결과다. 


 수능 당일에는 평소에 좋아했던, 속에 일말의 부담을 주지 않는 엄마표 카레라이스로 아침을 때우고 유부초밥 한 세트와 초콜릿이 묻은 영양바 한 개를 도시락에 담아 수능장으로 향했다. 전날 심혈을 기울여 골랐던 의자는 어느새 다른 의자로 교체되어 있었다.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밤새 이어진 것일까? 크게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창밖 풍경은 평온했다. 학교 밖은 수능을 의식한 듯 아무런 활동도 느낄 수 없었다. 길거리에는 사람이 없었고, 하늘에도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시간이 멈춘 나라 같았다. 풍경을 보니 긴장되던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이때만 해도 화창한 날씨가 재앙이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화창한 날씨는 늘 사람의 기분을 들뜨게 하고 좋은 징조가 있음을 암시하는 배경이 아니던가?


 1교시 언어 영역 시험을 시작으로 수능이 시작됐다.  언어 듣기 평가는 순조로웠다. 출제자가 만든 크레바스가 곳곳에 널려있었지만 빠지지 않았다는 안도감에 묘한 뿌듯함이 일렁거렸다. 이 페이스로 5교시 제2 외국어까지 달리면 수능이 끝난다. 



 하지만 문제는 언어 문제를 풀던 중 발생했다. 문제를 풀던 도중 갑자기 햇빛이 강렬하게 쏟아졌다. 당황할 필요는 없었다. 커튼을 치는데 10초면 충분했다.


 "어? 커튼이 왜...?"


 맙소사! 커튼이 없었다... 심장이 빠르게 질주했다. 넓어지는 모공에서 짠물이 삐질삐질 세어나왔다. 눈을 비비고 찾아봐도 창가에 가지런히 달려있어야 할 커튼이 없었다.

 시험지는 강렬한 빛의 칼날에 찢겨 버렸다. 시험지가 반으로 나뉘어 보였다. 위아래로는 강렬한 햇빛의 스포트라이트가, 중간 부분은 창틀에 막힌 빛의 그림자가 떡하니 자리 잡아 집중을 방해했다. 모든 소음을 막아 내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지구의 자전 운동까지 멈출 수는 없었나 보다. 빛의 공간은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아래로 이동했다. 땀이 삐질삐질 흘러내렸다. 손을 들어 감독관에게 상황을 설명했지만 감독관도 당황하여 어찌할 줄을 몰랐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고 나는 그냥 시험을 치겠다고 했다. 마지막 OMR 카드 마킹 때 손이 어찌나 떨리던지 두 손으로 펜을 잡고 카드에 검은색 마킹을 했다. 결과적으로 언어 영역은 지문도 다 읽지 못한 채 끝이 났다. 속상했다. 아니 그 보다 더 강렬한 표현이 필요하다. 좀전의 한 시간으로 내가 준비했던 대학은 이미 멀어졌다. 단순히 대학 진학의 문제가 아니다. 내 인생이 바벨탑처럼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짧은 휴식시간이 끝나고 바로 영어와 수리 시험으로 넘어갔다. 언어 시험의 여진은 여전히 마음 깊숙이 자리 잡아 나를 흔들어댔다. 하지만 시간은 내 편이 아니었다. 물론 누구의 편도 아니다. 그저 흘러갈 뿐. 가까스로 수리 영역 시험에서 정신을 차리고 시험을 치렀다. 그리고 속절없는 시간 속에서 수능이 허탈하게 끝나버렸다. 


 한 마디로 망했다. 주위에서 재수를 권했지만 나는 할 수 없었다. 트라우마가 생겨버린 것인데, 과연 다음 시험에서도 그런 비슷한 일이 벌어지지 말라는 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모든 시험이 끝나고도 손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노력했고 간절했기에 실망감도 더욱 컸다. 뚝, 눈물이 흘렀다. 


 모두가 미래를 예측하려 들고 인생의 방향을 점쳐보지만 인생이란 절대 예측할 수 없다. 때로는 가장 중요한순간에 평소에는 넘길 수 있는 별것 아닌 것들에 발목 잡혀 더 나아가지 못하는 일도 허다하다. 상황에 따라서는 따스한 햇살이 최악의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는 게 인생아니던가? 


 결국 나는 수시 모집으로 대학에 진학했다. CEO가 되고 싶던 내게 흥미로운 대학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비록 원하던 대학에는 낙방했지만 좌절하던 순간 새로운 가능성이 나타났다. 마치 별이 폭발하면서 소멸하는 동시에 그 에너지로 새로운 별이 탄생하는 우주의 신비처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