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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글 Sep 23. 2022

미국 중학교 왕따 사건

미국으로 이주했을 때, 솔직히 아이들 걱정은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몰랐지만 미국이 공부는 더 쉬울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고, 주변 사람들이 말하길, 아이들이 더 빨리 적응한다고 하니 그저 잘 지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생각은 참 무모하고 무식한 것이 었다는 걸 4-5년이 지나서야 알았다. 중학교 시기는 한국이나 미국이나 청소년기의 절정이고, 이 시기가 얼마나 아이들에게 중요한 지, 친구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 지 미처 떠올리지 못했다. 

나의 아이들은 참으로 평범한 보통 아이들이다. 특별히 뛰어나지도 않고, 그렇다고 아주 못하지도 않고, 지극히 보통의 한국 학생들이다. 그런데 중학생 신분으로 미국에 온 아이들은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바로 대자로 침대에 뻗기 일쑤였다. 미국 친구는 사귀기 힘들었고,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삶은 힘들었다고 나중에 털어놓았다. 언어의 장벽이 너무 높아서, 문화가 달라서, 아이들은 그냥 그렇게 하루하루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어쩔 땐 새로운 것에 신기해하고, 재밌어했지만  언어의 부재로부터 오는 결과물은 생각보다 컸다. 

다른 미국 아이들이 놀 때 우리 아이들은 생활을 위한, 지식 습득을 위한 영어를 공부해야 했다. 유튜브로 친구들이 사용하는 슬랭과 문화를 알아보고, 말은 못 하지만 적어도 그들 사이에 끼여 있으려 노력했다. 아이들이 내성적이거나 조용한 아이들이 아니었다. 특히 큰 아이는 초등학교 때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자마자 반 회장 선거에 출마하는 등 적극적인 성격의 아이였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저절로 얌전한 아이가 되었다. 


생각해보라. 사춘기의 중학생들이 친구 사이의 대화에 잘 끼지 못하고 말도 잘 못하는 아이를 누가 친구로 대해주겠는가. 실제로 이 문제가 왕따 문제로 불거 지기도 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건은 한국계 미국인 아이에게 일어났다.

중학교에 올라가자 한국 여자 아이들 대 여섯 명이 친구로 지내는 그룹에 미국에서 태어난 한국계 미국인 아이가  같이 끼고 싶어 했다. 그 친구는 비슷한 외모의 한국 아이들을 만나 너무 신이 나고 친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이 컸었던 것 같다. 그런데 한국 아이들은 같이 모여 놀 때 한국어로만 이야기했고, 이 한국계 미국 아이는 못 알아듣는 때가 많았나 보다. 처음에는 친구들이 하나하나 설명해주기도 했지만 계속 그런 일이 계속되니 사춘기의 아이들은 때로는 친절한 설명이 귀찮기도 하고, 때로는 설명할 타이밍을 놓쳐서 설명해주지 못하기도 하면서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그 아이를 무시 아닌 무시했나 보다. 이 같은 일들이 쌓이다 보니 마침내 이 한국계 미국 아이는 한국 애들이 자기를 왕따(Bully)시킨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왕따 당했다고 학교에 고발을 했다. 중학교는 발칵 뒤집어졌고, 학생부 선생님과 한국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ESL 선생님 등등이 점심시간에 이들을 관찰하기도 했다고 한다. 우리 아이는 성격상 이 한국 학생 그룹에 끼었다가 끼지 않았다가 하는 방관자의 입장으로 지내고 있었는데, 이 사건에 대해 목격자로 불려 가 선생님과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이 왕따 사건은 영어 못하는 아이가 아닌 한국어를 못하는 아이에게 생겼던 사건으로 장소는 미국이지만 똘똘 뭉친 한국 아이들이 사실상 한국어를 못하는 미국 아이를 따돌린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의사소통이 원활할 수 없었으니 서로 오해도 있었던 듯하다. 그 후 그 한국계 미국 아이는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대다수의 친구들과 함께 지냈고, 나머지 한국 아이들은 한국으로 돌아간 아이도 있고, 남아 있는 아이도 있는 등 뿔뿔이 흩어졌다. 

   

미국에 이주하고 나서 4년 정도가  지나고 나서야 나는 아이들과 허심탄회한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아이들은 3년 정도 지나고 나서야 미국 친구들을 사귀고, 만나기도 하고 했다 한다. 그래서 8학년 정도부터 친구들을 제대로 사귈 수 있었다고 한다.  또, 중학교 때는 제대로 된 공부를 하지 못했단다. 영어를 잘 못해서 이해가 쉽지 않았다고. 이 말은 자기가 고등학교 성적이 잘 나오지 않으니 했던 변명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고등학교 공부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은 맞긴 맞다. 친한 친구가 없었던 초기 3년 동안, 아이들은 학교에서 돌아오면 한국어 방송, 한국어 책을 보며 한국에서 보다 더 한국어를 탐닉했다. 한국 친구들과 대화하고, 게임하고, 그들 세대의 언어를 배웠다. 결과적으로, 아이들에게 이 시기는 영어로 무언가를 배웠지만 완전한 이해가 되지 않았던 반면에 한국어와 한국 문화는 더 파고들어 한국에 대한 이해를 더 명확하게 한 시기가 되었다. 아이들은 미국에서 좀 더 여유롭게 지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마음이 불편한 청소년기를 보냈고, 이에 대한 보상적 반항기가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에 걸쳐서 혹은 대학교를 갈 시기에도 나타났다. 미국에 와서 공부한 것이 다른 친구들은 누리지 못한 기회를 가진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실상은 마음이 한 시도 편한 시기가 없었다는 점에서 보다 힘든 청소년기를 보냈다고 볼 수 있겠다. 더군다나 아이들이 순전한 자신의 선택으로 외국에서의 학업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부모의 선택으로 따라온 것이기에, 잘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어도 그렇게 크게 작용하지 않았을 수 있다. 변명이지만 나도 영어를 배우고 적응하느라 바빠서 아이들을 돌아볼 여력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사춘기에 이루어진 인생의 커다란 변환점에 대해 좀 더 세심하게 관찰하고 많이 대화하면서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누가 가기 싫다는 사춘기 아이를 데리고 ‘미국 이주’와 같은 인생의 큰 변화를 꾀하고자 한다면 말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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