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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사서 May 29. 2017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말의 바다를 위해

미우라 시온, 『배를 엮다』


                                                                                                                                                                                                                                                                                                                                                      

일본 소설에는 자신의 일에 흠뻑 빠져 몰두하는 내용을 담은 것들이 많은 것 같다. '장인'이라고 해야하나. 이 소설도 마찬가지. 사전 편찬에 대한 주인공들의 뜨거운 열정과 의지가 담겨 있다. 말의 바다를 건너는 '사전'이라는 배를 엮어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처음에는 오그라들 것 같은 대사와 우연으로 일본 냄새를 풍겨 시무룩했지만, 읽다 보니 표현력이 상당히 좋다는 느낌을 받았다. 제목 자체부터가 그렇다. 수많은 말의 바다에서 상대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적절한 말의 의미를 안정되게 태워주는 사전이라는 배. "두 사람은 서로 손을 잡고 소리 내어 울었다. 슬픔에 짓눌려진 폐에 어떻게든 공기를 집어넣으려고 하듯이." 라는 문장에서도 작가의 섬세한 표현력을 느꼈다.


이 소설에 나쁜 사람은 없다. 그저 자신의 일에 최선의 노력을 다할 뿐. 주인공인 마지메는 다소 어리숙하지만 '성실'이라는 뜻의 이름을 갖고 있는 사람답게 엄청난 사명감으로 똘똘 뭉쳐있고, 그 주인공에 사랑으로 다가온 예쁜 가구야는 요리사로서 최선을, 마지메가 만드는 사전을 인쇄할 종이를 맡은 제지 담당 직원은 '손에 감기는' 손맛의 종이를 만들기 위해 성심을 다한다. 모두 자신의 일에 어느 때고 어디서든지 마음을 다한다. 특히 마지메는 늘 대화 속에서 무슨 단어를 들으면 항상 그 의미와 용례를 떠올린다. 그러지 않아도 될 상황에서도. 이쯤 되면 직업병을 넘어선 천직이라고 해야겠지.


어떻게 보면 사소할 수도 있고 사전을 요즘 누가 종이로 보냐고 할 수도 있지만, 게다가 자사에서도 돈이 안 된다고 잘 밀어주지 않는 사전이지만, 작은 과정 하나하나에도 심혈을 기울이는 모습에 흐뭇하기까지 했다. 마음이 슬펐을 때 이 책을 보았는데, 덕분에 그 깊은 새벽에 마음이 많이 따뜻해졌다. 있을 법 하지만 요즘같은 때에 보기 드문 사람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 남겨두기


"마지메가 '요리인' 표제에서 떠올린 것은 물론 가구야다. '요리를 업으로 하는 사람', 이 '업'은 근무나 일이라는 의미이지만, 그 이상의 깊이도 느껴진다. '천명'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요리를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 요리를 해서 많은 사람들의 배와 마음을 채우라는 운명을 지고 태어난 선택받은 사람." - 115 p.


마지메가 드물게 바로 귀가 준비를 했다.

"어쩐 일이야, 벌써 가려고?"

"가구야 씨가 오늘 처음으로 조림 요리를 맡게 됐나 봐요. '우메노미'에 가서 먹어 볼까 하고요."

마지메는 기쁜 듯이 자료와 원고 꾸러미를 가방에 찔러 넣었다. - 182 p.


"사전을 만들면서 말과 진심으로 마주서게 되고서야 나는 조금 달라진 느낌이 든다. 기시베는 그렇게 생각했다. 말이 갖는 힘. 상처 입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지키고 누군가에게 전하고 누군가와 이어지기 위한 힘을 자각하게 된 뒤로, 자신의 마음을 탐색하고 주위 사람의 기분과 생각을 주의 깊게 헤아리려 애쓰게 됐다." - 258 p.


"잉크의 미묘한 배합에 따라 글씨의 점도며 색조며 농담이 달라진다. '궁극의 종이'에 어울리는 잉크는 어느 것일까. 기계를 어떻게 조정하면 읽기 쉽게 인쇄될까. 인쇄 회사, 제지 회사, 마지메 사이에서 검토가 거듭되었다. 때로는 공장에 가서 숙련된 인쇄공과 직접 상담하는 일도 있었다." - 304 p.


"재단하기 전의 커다란 종이는 은근한 열을 품고 있었다. 이성으로는 인쇄기를 통해 왔기 때문이란 걸 알고 있지만, 마지메는 그걸 아라키나 마쓰모토 선생의, 기시베나 사사키나 자신의, 《대도해》에 관련된 많은 학자와 아르바이트 학생의, 제조 회사와 인쇄소 사람들의 열정이 응축된 열이라고 믿었다." - 318 p.


"말은 때로 무력하다. 아라키나 선생의 부인이 아무리 불러도 선생의 생명을 이 세상에 붙들어 둘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하고 마지메는 생각한다. 선생의 모든 것을 잃어 버린 것은 아니다. 말이 있기 때문에 가장 소중한 것이 우리들 마음속에 남았다. 생명 활동이 끝나도, 육체가 재가 되어도, 물리적인 죽음을 넘어서 혼은 계속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선생의 추억이 증명했다." - 328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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