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죽음을 슬퍼하는 노래
“자 이제 입관하십니다. 그전에 5분 동안 마지막 대화를 나누시겠습니다..”
장의사가 자리를 피하고 우리 가족은 할아버지와 마주했다. 굳게 닫힌 입과 꼭 감긴 눈 위로 저마다의 작별인사를 고하는 순간 나는 너무나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편안한 곳으로 가셨을 거라며 동생들을 위로하는 큰고모, 맏아들로서 할아버지 가시는 길을 지키는 아버지, 흔들어 깨워보며 할아버지를 부르는 작은아버지, 더 이상 아버님 얼굴을 볼 수 없다며 눈물을 흘리시는 어머니 옆에서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2013년 가을, 65주년 국군의 날 행사를 준비하는 사관생도 및 국군 장병들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은 무심히 흘러 서울공항의 활주로를 적셨다. 추석 연휴 기간을 반납하고 훈련에 매진하던 나는 한 통의 전화로 할머니의 웃는 얼굴을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상태가 악화되어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시고 뼈밖에 남지 않으신 할아버지, 수화기 너머로 애정표현이 부족한 손자의 형식적인 안부인사에 그저 ‘응~’하고만 대답하셨다. 2013년 가을의 어느 날, 지극히 형식적이고 누구에게나 건네는 이 대화는 할아버지와 나의 마지막 대화가 되었다.
1년에 두 번, 명절에만 뵙던 할아버지, 전형적인 가부장적 아버지상을 하시던 할아버지, 아무런 말씀 없이 그저 한 켠에서 가족들의 대화를 지켜보시던 할아버지.
“그래도 할아버지가 품에 안았던 아기는 장손인 너밖에 없다는 걸 기억하거라.”
할아버지를 뵐 때마다 어머니께서 자주 해주신 말이다. 할아버지의 그러한 무뚝뚝함은 오히려 더 크고 따듯한 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무뚝뚝해서 따듯했던 그의 표현 방식은 지금 그가 없는 하늘아래 그의 가족과 그의 손자의 가슴을 파고든다.
죽음이 낯설었던 청년에게 알게 모르게 쌓여왔던 정은 눈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다음에 뵙게 되면 꼭 전해드리고자 했던 말이 계속해서 떠오른다.
“할아버지 추석 때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그러나 다음에 할아버지를 뵙게 된 청년은 이 간단한 말을 전하지 못했고 그러나 다음에 청년을 만난 그 노인은 이 간단한 말을 듣지 못했다. 할아버지가 입관하시기 직전, 나는 추석 때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했다는 말을 전하지 못해 눈물을 흘렸다.
할아버지는 10월 2일 새벽 4시에 숨을 거두셨고 10월 1일은 손자가 땀 흘려 준비하던 국군의 날 행사가 있는 날이었다. 무사히 행사를 끝마칠 때까지 기다리셨던 걸까, 할아버지는 손자가 그동안의 훈련으로 지쳐 잠든 새벽에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동안의 훈련으로 지쳐 잠든 손자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걸 알리는 가족들의 전화벨 소리도 듣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 소식을 접한 나는 그저 찾아뵙지 못한 아쉬움만이 사무쳤다.
22살,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할아버지까지 돌아가셨다. 점점 주변사람의 죽음에 대한 소식이 들려온다. 벌써 죽음이라는 단어를 가슴으로 맞이해야 하는 나이가 되어버린 걸까 생각해 본다. 누군가가 죽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조차 해본 적 없는 내가 장례절차를 알게 되고 주변 친구들은 상을 당한 지인들을 찾아뵙는 예를 알고 있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세상을 알아가는 것은 중요하지만 죽음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니, ‘나’라는 작은 청년은 ‘세상’이라는 거대함에 더욱 움츠러들었다.
3일장의 마지막 발인을 하는 셋째 날의 아침, 할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들고 평생을 사셨던 집으로 들어왔다. 하늘 위로 혼이 올라가고 땅 밑으로 육신이 묻히기 전, 살아생전에 가장 오래 머무르신 보금자리를 마지막으로 보고 가시라는 의미였다. 지켜보시는 할머니의 눈에 눈물이 고였고 그런 할머니를 바라보며 혼자서 지내셔야 한다는 안타까움이 눈물이 되어 내 눈가에 맺혔다. 할아버지가 땅속으로 들어가시고 할머니의 곡소리는 커져만 갔다. 할머니의 곡소리와 처음 보는 아버지의 눈물이 ‘저들에게 할아버지의 죽음은 어떤 것을 의미할까’하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 언젠가 나의 아버지도 나의 아내도 죽음을 맞이하는 날이 오면 나도 저들과 똑같은 감정을 갖게 되리란 생각이 가슴을 자극하여 피부 끝까지 전해진다. 가슴 아프지만 받아들여야 하는 사실이라는 것이, 삶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새파란 20대 청년을 ‘죽음’ 앞에서 사무치도록 서럽게 만들었다.
8월 말, 여름휴가가 끝나고 학교로 복귀하기 직전, 추석 연휴에 찾아뵙지 못할 것을 염두에 두고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뵈러 갔다. 오랜만에 뵈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앙상한 뼈만 남아있었고 방 안에 누워만 계셨다. 그런 할아버지 옆에서 잠을 청하던 밤,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께서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듯 힘없이 뒤척이셨다. 그러나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아직도 모른다, 할아버지가 왜 아무 말씀 안 하셨던 건지. 손자가 잠에서 깨지 않도록 하려고 하셨던 걸까, 손자에게 추한 모습 보이지 않으려 하셨던 걸까, 아니면 한마디 말조차 할 힘이 남아있지 않으셨던 걸까. 나는 본능적으로 할아버지께서 내가 그 모습을 보지 않기를 원하신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눈을 뜰 수 없었다. 할아버지는 결국 아무 말 없이 불을 켜시고 옆방에서 주무시던 할머니의 부축을 받아 옆방으로 가셨다. 나는 눈을 뜰 수 없었다. 할아버지는 옆방에서 기저귀를 갈았다. 나는 불이 꺼질 때까지 눈을 뜰 수 없었다. 눈을 뜰 수 없었지만 정적 속에서 나는 귀로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았다. 귀로 보았던 할아버지의 모습은 평생 잊어버릴 수 없는 그림으로 남았다. 그때 나는 눈을 뜰 수 없고, 귀도 닫을 수 없었다.
할아버지께서 관 속으로 들어가시기 직전, 죽음이 낯설었던 청년의 입에서는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지만 청년은 눈물로 작별을 고했다.
“자 이제 입관하십니다. 그전에 5분 동안 마지막 대화를 나누시겠습니다..”
“할아버지, 추석 때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훈련받느라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었지만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이 계속해서 새어 나옵니다. 할아버지께서 이 못난 손자가 탈 없이 훈련을 끝마칠 수 있도록 지켜봐 주신 거라 생각합니다. 형식적인 안부인사 말고는 할 줄 몰랐던 못난 손자인데... 그 못난 손자 끝까지 지켜주신 것 같아 더욱 가슴이 저려옵니다. 고작 그 몇 마디가 마지막 대화가 될 줄 알았다면, 좀 더 손자로서 애정이 담긴 이야기를 나누었을 텐데, 할아버지, 죄송합니다. 이 늦은 사죄가 하늘에서도 들리기를 기도합니다.”
2013년 가을, 죽음이 낯설었던 청년은 가슴으로 죽음을 맞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