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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재균 Dec 02. 2022

나를 치유하는 시간과 공간

우리는 어디서 왔고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중략>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한 번은 들어본 적이 있는 정호승 시인이 쓴 <수선화에게>라는 시다. 친구의 외로움에 대한 넋두리를 들어주다가 “외로움은 죽음과 함께 인간이 가진 숙명적인 본질이기에 외로우니까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 시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수선화의 연 노란 빛깔이 인간의 외로움의 색깔이라는 생각에 수선화를 은유하여 인간의 외로움을 노래했다.


정호승 시인의 이력을 살펴보니 내가 어릴 적에 다녔던 초등학교에서 9년의 시차를 두고 같은 공간을 공유한 경험이 있었다. 대학시절도 학과는 다르지만 공간을 함께 하였다. 평소에도 그의 시를 좋아했지만 시간은 다르지만 함께 공간을 공유한 시인에게서 각별한 느낌이 들었다. 칠순이 넘은 나이에도 부드러운 인상을 가졌다. 자신의 어려웠던 어릴 적 경험에서 비극적인 현실을 따뜻한 시선으로 서정적인 시를 그려냈다.


시인은 강조하길 “누구나 가슴속에 시를 갖고 있으니 누구나 시인이 될 수 있다”라고 했다. 그래서일까? 최근에 나도 가슴속에 담긴 뭔가를 표현하고 싶다는 욕망이 일어났다.


나는 왜 시를 쓰기 시작했나?

글쎄다.

원고비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쓸데없는 짓을 하는 것은 아닐까?

먹고사는 것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을 내가 왜 하지?

굳이 대답을 해야 한다면 ‘그냥 쓰고 싶어서’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외롭고 힘들 때 더 쓰고 싶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고통이 없는 삶을 바라지만 지금까지 살아보면 고통이 없는 삶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삶에는 항상 여러 모양으로 고통이 찾아온다. 매일의 삶이 행복했다면 과연 시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까? 그렇지 않다. 탁닉한 스님은 “연꽃이 진흙이 필요하듯 행복도 고통을 필요로 한다”라고 했다.


그렇다.

외롭기 때문에 결핍과 고통이 있었기에 시를 쓸 수 있다.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사는 것이 무기력하고 힘들 때 ‘그냥’ 쓰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득 산문을 쓰면서 글이 너무 ‘주절주절’ 늘어지면서 내 마음에 담긴 생각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어떡하지?’

‘간결하게 나의 마음을 표현할 수 없을까?’라는 생각이 미치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이창동 감독 영화 <시>에서 김용택 시인은 “시를 쓴다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시를 써야겠다는 마음을 먹는다는 것이 어렵다”는 대사에서 용기를 내어 시를 써본다.


시인의 말처럼 시를 쓰겠다는 마음을 갖고 평소에 생각한 메모를 끄집어내어 한 줄 시작하면 그 뒤의 구절이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나온다. 물론 항상 그렇지는 않지만 평소에 관찰하고 느낀 그 감정을 메모했다가 한 줄 쓰기 시작하면 실타래가 풀려나오는 것처럼 글이 나온다. 신기한 일이다.


나는 외로울 때 시를 쓴다.

짐승이 상처 난 부위를 스스로 핥아서 치유하듯이, 아픈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 시를 쓴다. 난 시를 잘 알지 못한다. 어떻게 써야 하는지 배운 적도 없다. 어릴 때 백일장에서 그 흔한 상을 받아 본 기억도 없다. 기껏해야 중고등학교 시절에 학교에서 읽은 시 밖에 없다. 그나마 그것도 시를 엉터리로 분석하고 해석하는 기술만 터득했을 뿐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러니, 모르니까 더 배우면서 쓰고 싶다.




50대 중반이었나.


한창 생의 절정을 향해 달려갈 때 ‘내게 주어진 시간이 무한정 있는 것이 아니구나, 이렇게 살다가 떠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구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가장으로서 ‘생계의 책임’을 다해야 했고 자식을 키우고 사회생활을 하며 사람들과 부딪혀야 한다. 둘째가 대학 졸업 후 취업을 할 즈음이었다. 이제 ‘내가 할 몫을 그나마 다했다’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자식들 모두 자신의 생계를 책임을 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태어나 '자기 밥벌이'를 한다는 것이 그렇게 의미가 크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생계 너머로 조금 더 의미가 있는 고양된 삶을 살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일상은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단조롭고 아무런 의미가 없다. 때로는 병마와 싸워야 하고 가까운 사람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감으로 고통받고, 혹은 형제와 친구 간에도 다툼이 있어 서로 상처를 받는다.


그럴 때면 어딘가 훌쩍 떠나고 싶은 때도 있다. 일상의 삶과 반복된 일상의 쳇바퀴에서 뛰쳐나와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비루하고 따분한 일상의 시간 속에서 흐느적거리며 휩쓸려갈 뿐이다. 삶은 상처와 고통뿐만 아니라 가끔 생의 기로에 서서 중요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자유가 주어진 상황에서 오히려 불안과 고독을 느낀다. 그 선택의 결과는 나 홀로 감당해야 할 내 삶의 몫이기 때문이다.


나를 치유할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럴 때면 난 옷을 주섬주섬 입고 먼 곳의 산을 가거나 여의치 않으면 동네 뒷산이라도 간다. 어지러운 마음을 가라앉히고 상처가 난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서다. 그곳에 가면 항상 꽃과 나무, 푸른 하늘과 넓은 호수가 나를 반겨준다.


동네 산길에서 가끔 만나는 부부가 있다.

남편이 중풍이 심하게 왔는지 어눌하게 걷고 말을 잘하지 못하는 듯하다. 빨리 따라오라는 아내의 재촉에 뒤뚱거리면서 쫓아가는 모습을 보면 안쓰럽다. 병든 남편을 위한 그 아내의 정성도 대단해 보이지만 아픈 사람을 재촉하는 모습은 보면 내 마음이 짠하다. 내 나이 또래로 보이는 그 남편이 지나가면서 나를 쳐다보는 모습에서 얼핏 ‘나도 한 때는 당신처럼 그렇게 힘차게 걸었으니 너무 폼 잡지 마오~~’라고 말을 거는 것 같았다. 어쩌다 한순간에 말도 못 하고 아내의 뒤꽁무니만 쫓아가는 신세가 되었을까, 안타까웠다.


그 부부는 산길을 걸으면서 몸과 마음을 치유하고 있을 것이다. 산은 세상에서 상처를 받고 병마에 시달리는 사람들 모두를 끌어 앉는 것 같다. 병든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라는 손짓을 하고 있다. 나도 갑자기 뇌출혈이라도 오면 저런 상황을 피해 갈 수 없겠지. 혼자 중얼거렸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산길을 걷다가 어느 한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산책길 중앙에 쭈그리고 앉아 목놓아 울고 있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에도 울음을 멈추지 않는다. 그냥 흐느껴 우는 것이 아니라 가슴속 깊은 곳에서 온몸으로 울부짖는 소리였다. 갑자기 섬찟했다. 무슨 사연이 있길래 이렇게도 슬프게 울까?


안타까운 마음에 “괜찮으세요..?”

라고 물으면서도 응답을 기대할 상황이 아니다.

‘눈으로 보면 모르겠니?’

라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 여인은 잠시 울음을 멈춘다. 더 이상 얘기를 이어갈 상황이 아닌 듯하여 난 가는 길을 재촉했다. 무슨 사연이 있길래 그렇게 목 놓아 울었을까? 안타까운 마음에 중간에 다시 벤치에 앉았다. 머릿속에 상념이 어지럽게 흘러가는데 잠시 후 그녀는 내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마 그 여인도 깊은 절망감에 마음을 치유받기 위해 산길을 걸었을 것이다. 가족 중의 누군가 이 세상을 떠난지도 모르겠다. 크나큰 상실감을 어쩌지 못해 산을 찾았을게다. 산길을 걷다가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슬픔을 가누지 못해 ‘꺼이꺼이’ 목놓아 울었을 게다. 그렇게 울고 나서 조금은 치유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다시 아무 일도 없는 듯이 걸었을 것이라 상상한다. 산은 그렇게 인간의 슬픔과 고통을 품어 안고서 위로하고 치유한다. 시를 쓴다는 것도 현실의 고통을 직시하고 그 고난을 극복하려는 몸부림이 아닐까?


그 순간, 잘 알지도 못하는 남의 불행을 보면서 나를 돌아본다.

나에게 위안이 찾아온다.

남의 불행에서 나의 안위를 찾고 있으니,

참으로 역설적이다.

벤치에서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다.

나무에 둘러싸여 앉아있으면 내 몸과 마음이 함께 치유됨을 느낀다.


매일 가는 산길이라도 매 순간 새롭다. 산길을 걸으면 계절의 변화를 몸으로 느낄 수 있다. 오르막 길을 오르면서 심장이 힘차게 뛰고 숨이 목까지 차 올라 헐떡이는 소리만 들릴 때면 모든 잡념은 사라진다. 그 순간은 내가 온전히 살아있다는 느낌이 드는 나만의 시간이다.


숲 속 산길에 놓인 벤치에 잠시 앉아 숨을 고른다. 이곳은 나만의 공간이다. 사실 올 초에 시청 민원팀에 전화를 해 산길에 벤치를 더 많이 설치해 달라고 요청했다. 몇 주전에 산길을 걷다가 산책길 곳곳에 벤치가 많이 설치된 것을 확인하였다. 내가 낸 세금이 아깝지 않다는 느낌을 처음 받았다.


벤치에 앉아 떡갈나무를 살핀다. 추운 겨울을 버티며 생존하기 위해 스스로 나뭇잎을 다 떨어뜨려 앙상한 가지만 남았다. 말라비틀어진 잎사귀 몇 개가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파리하게 붙어 있는 모습이 안쓰럽다. 저 나무도 추운 겨울을 버티기 위해 자신이 아꼈던 것을 버리면서 저렇게 노력하는구나. 나무는 자연스럽게 자신이 힘들게 가꾼 꽃과 열매인 도토리를 아낌없이 자연에 돌려주고 앙상한 가지만 남았다. 바람이 한차례 지나갈 때면 나무에 남아 있는 향이 내 온몸으로 스며든다. 그 향기로 인해 내 몸은 치유를 받는다. 다시 새로운 생명의 꽃과 열매를 맺기 위해 춥고 시린 겨울을 견뎌낼 것이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보면서 내가 위로를 받는다. 숲 속에서의 이 순간은 번잡한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나만의 명상의 시간이다. 나는 왜 이렇게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할까? 이 결핍으로 인해 새로운 가능성을 꿈꾸고 노력하지만 어느새 그 꿈이 시들해진 나를 발견하곤 했다. 앙상하지만 당당하게 서 있는 나무를 본다. 무성한 푸른 잎을 다 떨어뜨리고 겨울을 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는 나무와 대면한다. 가끔 비바람에 쓰러진 나무들도 보인다. 그렇게 쓰러진 소나무 덕분에 옆에 있는 또 다른 나무는 햇빛을 더 잘 받아 무럭무럭 자랄 것이다. 인간도 자연과 함께 부모의 조건 없이 주는 사랑으로 지금까지 생존해왔다.


상수리나무를 보면서 위로를 받는다. 나무 존재 그 자체가 나에게 삶의 에너지를 준다. 몇 년 전부터 특별한 일이 없으면 매일 산길을 걷는다. 일상의 습관이 되었다.


맨발로 걷는 사람들도 눈에 뜨인다. 요즈음 맨발 보행자가 자주 보인다. 아마 맨발로 걷는 것이 유행인 듯하다. 맨발로 걷는 모습을 보면 왠지 위험할 것 같고 보기에도 뭔가 어색하다. ‘맨발로 걸으면 지압으로 인해 좋긴 하겠지만 너무 욕심이 과한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궁금해서 유튜브를 찾아보니 <맨발 걷기의 기적>의 저자가 직접 나와 강의를 한다. “맨발로 걸으면 코로나19도 걸리지 않는다”라고 강조한다.


글쎄다.

맨발이든 등산화이든 산길을 걷는 것은 몸에도 좋지만 정신 건강에 더 큰 도움이 된다. 산길을 걸으면 어느 순간 땀이 나고 온 몸이 후끈거리는 기분이 들 때 머리가 맑아진다. 봄이 되면 이름 모를 꽃을 보면서 감탄하고 여름이면 짙푸르게 자란 나뭇잎 덕분에 서늘한 그늘 아래서 잠시 숨을 고를 때가 가장 행복하다. 가을에는 노랗고 빨갛게 물든 단풍을 보면서 스쳐 지나가는 세월을 아쉬워하기도 한다.


겨울 문턱에 들어서면서 칼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는 한겨울에도 난 이곳을 찾을 것이다. 아무도 없는 산길에서 홀로 벤치에 앉아 음악을 듣는 것도 운치가 있다. 오늘은 비발디의 사계 중 <겨울>을 듣고 싶다. 악뮤의 <어떻게 이별을 사랑하겠어, 널 사랑하는 거지>도 들으련다. 비가 오는 날에는 조지 윈스턴이 연주한  <캐논 변주곡>을 들을 것이다. 마치 빗방울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는 것처럼 들리는 그 피아노 음률이 좋다.


산에는 상처받은 사람이 모이고 그 사람들은 치유를 받는다.

산에는 위로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오고 산은 그들을 위로한다.

외로울 때나,

슬플 때나,

기쁠 때나,

산을 오른다.

그래서 오늘도 홀로 산을 오른다.


삶과 죽음에 대한 서사를 그림으로 표현한 고갱의 작품 <우리는 어디서 왔고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를 다시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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