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고무고무- 참 많이 외치고 다녔습니다. 중학교 시절 반에서 친구들이랑 장난칠 때도 고무고무-하면서 친구 살짝 치고 도망가고 그러곤 했죠. 그만큼 원피스는 당시 중고등교 남학생들이 필수로 봐야 하는 만화였습니다. 만화 속 이슈가 있으면 학교에서 친구들과 그 이야기를 나누기 바빴죠, 당시 저는 원피스를 열심히 챙겨보는 편은 아니었습니다만, 이슈에 대해서만은 빠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교실 앞뒤로 그 얘기를 해대는데 모를 리가요.
하지만 그렇게 열렬하게 달아오르던 원피스가 이제는 차갑게 식었습니다. 단순히 원나블의 권좌를 같이 누리던 나루토와 블리치의 종료 때문만은 아닙니다. 박수칠 때 떠나라는 룰을 무시한 채 너무 오랫동안 이야기를 질질 끌고 온 탓도 있으며, 덕지덕지 붙은 설정들과 이제는 앞뒤 맥락이 맞지 않는 설정들까지 등장하고 있습니다.
오늘 포스팅에서는 옆 나라 국민 만화였던 원피스가, 이제는 사람들의 눈 밖에서 벗어나게 된 이유에 관해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그럼 바로 시작해볼게요.
1. 컨텐츠 소비 방식이 변했다.
앞서 원피스의 내용적인 측면을 단점으로 내세웠는데요, 그 외에 원피스의 인기가 떨어진 이유를 외부에서 살펴보자면 컨텐츠 소비의 방식이 바뀌었음을 이유로 들 수 있겠습니다. 국내 컨텐츠로 비유하자면 무한도전이 그러하죠. 국내 불편러들에 의해 무도가 망한 것이다라는 말도 있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소비자들의 컨텐츠 소비방식이 더 이상, 한 컨텐츠를 오랫 동안 지속하는 것에 방점을 두지 않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이제 소비자들은 짧게 짧게 컨텐츠를 소비하는, 단기간 내에 확실하고 농후한 재미를 얻으려고 하는 방식으로 컨텐츠를 소비하고 있어요.
국내 예능 프로그램은 매번 새로운 게스트를 출연시켜 새로움을 불어넣는 방식을 취하고 있죠. 음악도 3분 30초를 넘기지 않고 짧고 굵게 귀를 즐겁게 하며, 만화도 1쿨 (12화)을 잘 넘기지 않습니다. 소비자 반응보고 인기있으면 2기, 3기 제작해내는 방식이죠. 하지만 원피스는 소비자 반응을 보기 보다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죠. 문제는 묵묵히 가는 것을 넘어서서 스토리가 늘어진다라는 느낌을 준다는 것입니다.
원피스를 누르고 일본 내 만화 판매량 1위를 기록한 [귀멸의 칼날]의 경우 단행본 23권을 끝으로 이야기가 끝났습니다. 아쉽지만 잘 끝냈습니다. 모든 만화는 스토리 상 이쯤에서 끝내면 딱 좋겠다라는 시점에서 끝이 나야합니다. 그 시점을 넘기게 되면 그 동안 반가웠던 주인공들이 지겨워지기 시작하며, 또 똑같은 유형의 적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싸우는 주인공들을 우리는 반복해서 봐야만 합니다.
2. 능력자물의 과다 공급
한 때 능력자물은 모든 사람들이 관심을 두는 재밌는 소재였습니다. 예전에 미국 드라마 히어로즈가 엄청 인기가 많았던 것도, 그동안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능력들을 가지고 서로 전투를 해내는 모습들에 사람들이 흥미를 느꼈기 때문이죠. 능력자들이 때로는 재밌는 케미를 보여주고, 때로는 갈등하며 서로 분열되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누가 더 셀 거다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얘가 더 강할 거다 이런 말싸움을 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요. 불 능력이요? 너무 흔합니다. 빠른 스피드요? 이건 능력이 아닌 것 같아요, 다 기본으로 가진 패시브 스킬이 되었는걸요. 개인적으로 10년의 마블 유니버스가 끝이 나면서 능력자물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고 생각합니다. 나올 수 있는 능력들은 거의 다 나왔을뿐더러, 아무리 새로운 능력도 더는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거든요.
오히려 이제는 능력이 없는 것이 능력으로 보입니다. 원피스를 예로 들면 코비같은 인물이 이제는 더 매력적으로 느껴진다는 거죠. 일상적인 인물이 노력을 통하여 자신만의 가치에 눈을 뜨고 그 가치로 세상과 맞서 싸우는 스토리에 사람들은 열광합니다. 어쩌면 고전적인 스토리이기도 하지만, 이 스토리에는 감정적인 부분이 서려 있기 때문에 마음이 갑니다. 이제 사람들은 특별한 것을 더는 특별하게 여기지 않아요. 내가 느낀 일상의 감정이어야만, 내가 공감이 가야만 그 콘텐츠에 지속적인 눈길을 줍니다.
3. 해결 방법 : 보물찾기의 본질로 돌아가거나 / 새로운 싸움의 룰을 확립하기
다시 예전의 고무고무의 인기를 되찾기는 쉽지 않겠지만 흐름을 바꾸는 방법은 있습니다. 먼저 보물찾기라는 원피스의 본질로 되돌아가는 겁니다. 원피스는 세상에 하나뿐인 보물이죠, 루피도 이 원피스를 찾기 위해 모험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패기 / 능력 각성 이런 것들에 눈이 가다 보니 본질을 잊었죠. 보물 찾기라는 원래 목적으로 되돌아간다면 원피스가 풀어낼 콘텐츠는 정말로 다양해집니다.
수수께끼를 하나하나 풀어나가는 원피스식 지능형 스토리 방식도 가능하며 그 가운데 중간중간 적절하게 배틀물 요소까지 더해진다면 기존에 갖고 있던 원피스 흐름에서도 벗어나지 않습니다.
한편 새로운 싸움의 룰을 확립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이전에 이글이글 열매를 얻기 위해 토너먼트식 대회가 열렸었죠. 그런 방식으로 일종의 가상의 스포츠룰을 설정해서 그 안에서 주요 인물들이 싸우게 된다면, 소위 말하는 '누가 더 세냐'라는 독자들의 갈망을 해소할 수도 있습니다. 안 싸울 것 같았던 두 대상을 싸움 붙이는 것도 이런 스포츠 룰 안에서는 가능하구요.
이런 식의 새로운 틀을 적용했을 때, 원피스가 과거의 인기를 되찾는 정도까지는 어려워도 신선함을 독자들에게 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4. 연출의 신선함 : 언플래트닝
우리가 책을 읽기 싫어하는 이유도 신선함이 떨어지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단지 줄 글이 가득한, 내용은 다를지 몰라도 책이라는 재화가 같은 포맷이 크게 변하지 않느니 읽고 싶은 마음이 떨어지는 것이죠.
이런 일반적인 책 구성과 다른 책이 지금 소개해드리는 [언플래트닝]입니다. 이 책은 캘리포니아 대학교에 제출된 논문입니다. 만화책 형식의 논문이라 사람들이 꽤 관심을 가졌던 작품이기도 합니다. 내용은 우리가 어떻게 인식을 하는지 / 사람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관점이란 무엇인지, 왜 관점을 다양하게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내용 자체는 쉽지 않지만 이미지가 탄탄하게 보완해주고 있어서 몰입해서 읽었던 책이에요. 기존의 책들과는 다른 형식상의 신선함을 주기에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5. 마무리 : 신선함이 필요해
모든 상황에 신선함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23년 동안 같은 캐릭터들만을 보다 보면 감정이 무뎌지고 이전만큼 설레지 않는 게 당연합니다. 아무리 좋은 친구라도, 23년 지기라면 이제 더는 할 말이 없죠. 대신 그동안 안 했던 여러 가지 새로운 활동들로 관계의 텐션을 다시 올리는 건 충분히 가능합니다.
원피스도 원래 내건 보물찾기라는 타이틀로 다시 돌아가, 원피스만이 낼 수 있는 특유의 수수께끼 풀이의 재미를 보여준다거나, 새로운 전투 방식의 도입으로 기존에 없던 재미를 주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리라 생각해요. 살짝 삐끗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뭐 어때요. 20년 넘게 곁은 지켜준 팬들은 그런 실수를 손가락질하며 욕하기보다 오히려 작가가 독자들을 위해 그래도 여러 시도를 하고 있다고 느낄 겁니다. 지금 시점에 원피스에 필요한 건 이런 시도들을 한다는 그 사실 자체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