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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entress Dec 04. 2020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한다

사람에게 어떤 판단력을 내리게 하는 건 결국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누군가에 대해 특정한 인상을 받는 것에는 어떤 식으로든 경험이 필요하다. A와 B 사이에 C가 있다. A는 C를 직접 만나봤거나 B에게 들은 바를 통해 C에게 고정적인 캐릭터를 씌운다. 이런 직간접적인 경험이 가져오는 판단은 음식이나 영화, 장소에도 자주 효용 된다.


 여행지에 대한 인상도 이와 비슷하다. “거긴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 시리아나 팔레스타인과 같은 나라를 떠올리면 이런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CNN에서 폭동이나 집단 폭행 장면을 본다면 직접적인 체험 없이도 이미 심정적으로 충분한 경험을 한 것이나 다름없게 된다. 하지만 소위 위험한 국가로 선정된 곳에서도 겁 없이 카메라를 들이대며 실시간 방송을 무사히 해내는 유튜버도 있고, 일생일대의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긴 무용담을 에세이로 써낸 작가도 있다. 앞의 나라들과는 직간접적인 경험의 이미지가 반대지만 바꾸어보면 한국도 마찬가지다. ‘누베오’라는 온라인 데이터 분석사이트가 전 세계 치안 수준 순위를 매겼는데 한국은 117개국 중 1위에 올랐다. 내 생각에도 한국은 꽤 안전한 나라다. 우선, 커피숍 테이블 위에 노트북이나 휴대폰을 올려두고 자리를 비워도 별다른 일이 없다. 총기 소지는 금지되어 있고 소매치기를 당하는 일도 흔치 않다. 하지만 뉴스에서 성범죄와 강도, 살인 같은 끔찍한 소식을 전해 듣는 것이 어렵지 않다는 점에도 안전을 안심할만한 여지는 없다. 결론적으로 개인이 어떤 경험을 어떤 순간에 하느냐에 따라 판단의 80%가 고정된다고 볼 수 있다. 

 베를린에서 내가 가장 많은 사람을 본 곳은 대중교통 안이다. 베를린의 대중교통은 3가지다. 지하로 다니는 U반, 지상으로 다니는 S반으로 나뉘는 지하철, 트램, 버스. 한 달 동안 무제한으로 모든 교통수단을 이용할 수 있는 정액권을 샀다. 독일어로 달을 뜻하는 Monatz, 티켓을 뜻하는 Karte를 합쳐 이를 모나츠카르테라 부른다. 가격은 82유로인데 하루에 6번 정도를 타고 여기저기에 다녔으니 그럴 때마다 표를 샀다면 적어도 200유로를 썼을 것 같다. 

 알다시피 여행지에서 받는 인상은 그것이 일회성이더라도 사람으로 하여금 굉장히 강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게 만든다. 온갖 사람들이 다 몰려드는 지하철과 트램 안에서 나는 설왕설래하며 판단을 했다. 한 번은 마리엔플라츠 역에서 U반을 탔는데 빈자리가 보여서 앉았다. 내 옆에는 럭비 선수처럼 덩치가 큰 근육질의 남자가 앉아 있었는데 건너편 자리의 두 사람과는 친구인 듯 계속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안 그래도 앉을 때부터 어깨로 남의 자리를 침범해서 앉아있는 남자를 보고 불안함이 들었는데 그는 역시나 이상한 행동을 시작했다. 선글라스를 아래로 반쯤 내린 채, 큰 어깨를 내게 기대더니 내가 보고 있는 휴대폰 화면을 쭉 응시했다. 그리고는 건너편에 앉은 친구들과 웃고 떠들면서 이야기를 했다. 독일어로 말해서 알아듣지 못했지만 ‘Frau’라는 단어와 ‘Gute’라는 말이 오갔다. 그리고 남자는 친구들과 나를 평가하듯이 쳐다보다가 말하고는 했는데 이들의 모습에 나는 점점 화가 부글부글 끓었다. 분노는 들끓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자리를 탈출하는 것 말고는 없었다. 다음 역에서 하차하는 척하고 문 앞에 섰더니 내 옆의 남자가 친구들과 사인을 주고받더니 내 옆에 섰다. 나는 황급히 내려서 다시 다른 칸에 승차하고 그를 따돌렸다. 

 한 번은 C/O베를린에 갔다가 트램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돈을 구걸하는 사람은 베를린의 대중교통 안에서도 자주 보인다. 그날 따라 행색이 유달리 추레하고 구걸 경력에서 나오는 바이브가 10년 차는 족히 돼 보이는 걸인이 트램으로 들어왔다. 보통은 사람들 사이를 지나다니기만 하는데 그는 사람을 위협하듯이 쳐다보며 손을 내밀었다. 사람이 없는 시간이라 그가 뒤로 이동할수록 더 당황이 됐다. 내릴지 말지를 고민하는 사이에 노부부 두 사람이 다가와서 내 옆자리와 건너편 자리에 앉았다. 그 중, 할아버지는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사람이었는데 “괜찮으니 안심하라고” 말해주었다. 할머니는 갈색 스트랩 백에서 꽃무늬가 잔잔한 틴케이스를 꺼냈다. 그리고 틴 케이스 안에 든 사탕을 꺼내서 건넸다. 우리 셋은 자리에 나란히 앉아서 사탕을 하나씩 입에 넣고는 걸인이 오지 못하게 강렬한 눈빛을 쏴댔다. 

 이 두 무리가 내가 베를린의 대중교통에서 만났던 아주 상반된 사람들이다. 첫 번째 무리와 두 번째 무리를 만난 사이에는 열흘 정도의 공백이 있었다. 그 공백에는 코트부서 토어에서 당한 인종차별까지 더해져서 아주 편중된 기분에 젖어 있었다. 결과적으로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기분을 상쇄했지만, 그때 그 트램을 타지 않았다면 나는 그 방향으로만 베를린에 대한 기억을 가졌을지도・・・.



 가끔 저는 천국에 가도 나쁜 사람이, 지옥에 가도 좋은 사람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염라대왕이라도 일이 몰리면 판단을 잘못 내릴 순 있는 법이니까요. 그러니 어디에서라도 나쁜 사람을 만난 분들, 기운 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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