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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entress Nov 30. 2020

어라, 빵과 복숭아로도 충분하네요

요즘 매일 요리를 한다. 마땅히 요리라고 하기엔 너무 간단한 조리를 하고 있어서 좀 멋쩍다. 하지만 서울에서 부엌에 들어가는 일은 냉장고 문을 열거나 다 마신 컵을 싱크대에 갖다두는 정도였으니 삶의 형태 자체가 달라졌다고도 할 수 있다. 형태가 바뀐 건 고민의 종류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다음 달에 일이 끊기면 어떡하지?”, “이대로 괜찮은 걸까.” 서울에서 내가 주로 했던 자질구레한 고민을 당분간은 하지 않아도 된다. 여기선 그보다는 확실히 작지만 결단코 사람을 지치게 하지 않는 고민을 해본다. “내일 아랫집 할아버지 만나면 독일어로 인사해볼까?”, “비가 오다 그치면 더워질 텐데 그냥 반팔을 입을까?” 같은 것들이다. 

 그리고 매일 매일 “오늘 뭐 먹지”라고 생각해본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오늘 뭐 해 먹지?”가 된다. 독일은 현지 사람들마저 인정할 정도로 특별한 음식이 따로 없다. 슈니첼이나 학센같은 음식을 매일 먹을 수도 없으니 그들의 주식은 빵 정도로만 봐도 무방할 것 같다. 베를린의 음식은 대체로 너무 무겁거나 별다를 게 없다. 이탈리안이나 프렌치뿐만 아니라 아시안 레스토랑까지 쉽게 찾을 수 있지만, 굳이 ‘베를린의 쌀국수 맛집’, ‘베를린의 홍합 스튜 맛집’을 도장 깨기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밖에서 사 먹는 재미를 며칠 누려보지 못하고, 집에서 음식을 만드는 것에 도전해야 하는 상황에 빠졌다. 뭘 만들지 고민하는 것이란 누가 해주는 밥을 먹거나 사 먹을 때 고민하는 것과는 엄연히 다르다. 식재료를 사러 가고 다듬고 소분해서 보관하고, 요리를 하고 치우는 과정은 생각보다 매일매일을 다르게 만들어준다. 

  아침에 일어나면 토스터에 미리 썰어둔 빵 1조각을 넣는다. 팬에 올린 달걀을 서니 사이드로 익히고, 작은 볼을 꺼내 우유를 따르고 시리얼을 붓는다. 잘 구워진 빵을 담은 접시에는 토마토나 납작 복숭아도 올린다. 아침으로 넘치는 양이지만 3시간 30분짜리 독일어 수업이 오후 1시에 끝나는 것을 감안해 최대한 든든하게 먹어두려 애쓴다. 수업이 끝나면 집에 가방을 놔두고 다시 나가기 전에 점심을 만들었다. 온 손가락을 긴장 상태로 말아서 마늘을 최대한 얇게 썰고 올리브유에 볶는다. 소금과 오일, 후추 양만 적당히 맞춰두면 다음부터는 탄탄대로인 알리오 올리오를 자주 만들었다. 파스타에는 수정과에 올리는 건대추처럼 얇게 썬 선드라이 토마토도 함께 올렸다. 

 식사는 부엌에 있는 식탁보다 거실에서 자주 했다. 아침에는 햇빛이 그대로 들어오는 커다란 창문 앞의 작은 식탁에 접시를 올려뒀다. 의자에 앉아서 창문으로 출근을 하거나 학교에 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밥을 먹었다. 점심을 먹거나 저녁으로 간단한 샐러드를 먹을 때는 카우치에 다리를 주욱 펴고 앉았다. LP 플레이어에 <The Simpso

ns> OST나 <HIT MIX ’90/91> 바이닐을 올리고 편한 자세로 앉아 있으면 같은 메뉴라도 다른 기분이 든다.

  장은 일주일에 두 번씩 보러 갔다. 심심할 때마다 들를 용의는 충만했으나 하루가 멀다 하고 들락날락하다가는 생활비를 탕진할지도 모르니 주 2회로 나름의 제한을 두었다. 서울에서 동네의 작은 마트에만 가도 웬만한 식재료와 다양한 브랜드의 생필품을 살 수 있는 것에 비해 베를린의 마트는 단출한 기분이 든다. 조리된 식품을 판매하는 코너도 따로 없고 신선한 생선은 보통 백화점이나 파머스 마켓에서만 판다. 그런데도 호젓하게 카트를 끄는 힘은 저렴한 식재료에서 나온다. 서울에서 고기 1팩, 생선 1팩, 과일 2종류에 자잘한 생필품을 산다면 최소 15만 원 이상은 내야 한다. 그런데 베를린은 다르다. 무얼 집어도 대략 2유로가 넘지 않는다. 6개들이 납작 복숭아도, 고다 치즈 1팩도, 1.60유로 선에 맞출 수 있다. 시리얼, 닭 안심, 납작 복숭아, 토마토, 마늘, 링귀니 건면, 옥수수, 키친 타월, 섬유 유연제를 담았는데 20유로 정도가 나왔다. 가득 사도 계산이 이거밖에 안되니 흥청망청하고 싶은 생각도 자주 든다. 그런데 예상 외로 더욱 분수에 맞는 장보기를 하게 된다. 대량으로 사서 금액을 아끼거나 냉장고를 터질 정도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사서 남김없이 먹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유달리 맛있는 차이트 퍼 브로트(Zeit für Brot)의 하드롤과 마트에서 대충 골라도 좋은 치즈, 과할 때는 사람도 녹아버릴 것처럼 뜨거운 햇살을 받아 잘 자란 토마토, 1일 2복숭아를 실천하게 한 납작 복숭아만 있어도 충분했다. 저 4가지는 테이블 전체를 가득 채울 정도로 이것저것 시킨 메뉴가 없어도 풍요로운 생각이 드는 맛이다. 

  무엇보다 기필코 오늘은 맛있거나 멋진 것을 먹어야 하는 서울의 압박이 없다. 적어도 당분간은. 




참, 베를린에서의 즐거운 식사에는 맛있는 커피가 큰 몫을 합니다. 산미가 아주 강한데 부자연스럽지 않아 허브 캔디를 입에 넣은 채로 시원한 탄산수를 마시는 기분이 듭니다. 언제 다시 맛볼 수 있을까요? 어학원의 미국 친구들은 되려 콜드브루가 그립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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