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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호 Nov 10. 2020

누구나 참호가 필요하다

- 섬광처럼 드러나는 유토피아의 풍경을 위해

어린 시절 동화의 세계 속에서 살 때에는 세상이 편안했습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친절하고 선량했지요. 다 저를 도와주려 했고요. 세상 모든 것이 저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듯했습니다. 간혹 악마나 마법사 같은 '악의 무리'가 나타나는 듯하기도 했지만 주변의 영웅들이 다 해결해 주었습니다. 모든 것이 해피엔딩인 세상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제가 살던 동화 속 세계의 천장에 금이 쩍 하고 가더니 마치 은박지가 찢어지듯 그 아름다운 세계가 찢겼습니다. 그 너머로 드러난 세계는 전쟁터였습니다. 실제 총알이 날아다니는 것은 아니지만,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습니다. 세상의 비극적 현실이 가감 없이 드러나는 세계였지요.  


그 세계 속의 사람들은 저마다 혀에 독을 품고 부지불식간에 상대의 마음에 생채기를 냅니다. 어떻게든 그 독선적이고 제멋대로인 사람들, 자신에게는 관대하면서 타인에게는 예민한 사람들, 조금만 어리숙하면 이용하려는 이들에게서 필사적으로 도망치려 합니다. 하지만 어른의 숙명은 그걸 허용치 않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의 발걸음은 터덜터덜입니다. 영혼은 너덜너덜, 마음은 울고 있습니다. 


참호가 필요했습니다. 전쟁터에서 잠시나마 총알을 피해 머리를 숨기고 호흡을 가다듬을 수 있는 곳, 그런 참호가 절실했지요. 


젊을 적 저의 참호는 시와 소설의 세계였고 책의 세계였습니다. 어둠이 내릴 때 책장을 열고 동이 터 올 때 책을 덮으면 마치 다른 세상이 펼쳐진 듯한 느낌이 들곤 했습니다. 굳이 어느 시인처럼 문학의 세계에서 내가 왕일 필요도 없었습니다. 잠시 숨을 돌리면 되었으니까요. 원래 유토피아는 섬광처럼만 존재하는 것이지요. 그 섬광을 때때로 만날 수만 있어도 기뻤습니다. 


허나 한동안 참호를 비워두었습니다. 한두 발 날아든 총알에 놀라 뛰어 나가 버렸지요. 그 후론 그 참호를 찾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단편 소설 하나를 정말 우연히, 아무 생각 없이 읽었는데 앗, 다시 섬광을 만났습니다. 그 소설은 아직 당도하지 않은 먼 미래의 이야기를 통해 오랫동안 잊었던 과거를 제게 환기시켜 주었습니다. 반갑고 기뻤습니다. 고마웠고요. 


간혹 참호를 찾을 것 같습니다. 자주 들르지는 못하겠지만 잠시잠시 몸을 던져 쉴 수 있다고 생각하니 든든합니다. 


누구나 참호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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