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서 차마 버리지 못한 색 바랜 가방 같은 물건들이 숨을 쉬다니
벽장은 고정된 공간이다. 그곳은 아주 “튼튼한 어둠”으로 가득 차 있다. 배내옷이 있고, 거기 젖내가 있고, 눈물이 있다. “먼지 속에서도 번들거리는 저 표면들”은 고정되어 있다. 벽장은 가만히 서서 움직이지 않기에 수많은 것들을 모아둘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나를 “가슴 세우고 깨금발로 서서” 숨을 돌이켜 보게 만들었다. 벽장은 이미 지나간 것들을 묶어두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나를 스치고 지나간 시간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내 시절을 뜨겁게 훑고 간 것들이다.
벽장은 움직이는 시간을 고정시키는 장치이다. 그러니까 나는 움직이지 않는 것들 속에서 움직이는 것을 본 셈이다. 벽장에는 “색 바랜 가방 같은 물건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고민 많던 청년의 눈물”도 있고, “첨이자 마지막으로 입술 주고 떠난 여자”도 있다. 시간에 의해 산일된 것들에 대한 향수가 나를 벽장 속으로 이끌었고, 거기서 “가슴 아린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벽장은 나를 거쳐 간 시간의 편린들을 보관하는 곳, 나는 지금 그 시간들 속을 헤매고 있다.
그러므로 지나간 시간에 대한 회귀적 심성은 단순한 향수를 넘어선다. 단지 지나간 것이어서 되돌아보는 게 아니라, 그것들은 나에게 상처를 준 것들이거나 절망을 안겨 주었던 것들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튼튼한 어둠”이 그러한 사실을 암시해 준다. 결국 벽장은 나의 향수를 달래주는 매개체가 아니라 상처와 고통을 보편적 지평으로 넓힘으로써 위안과 위로를 선사하는 장치라고 할 수 있겠다. 승화된 공간으로서의 “벽장”을 말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