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프 시평 #34 생生이 지나간 자리

생명의 시간이 나타낸 그래프

by 정건우


비 온 뒤 지렁이가 기어간 진흙 위의 선을 가만히 보면 살아있는 것들의, 혹은 살아간 것들의 흔적이 남긴 허무성이 여실히 드러난다. 그 선의 흔적은 햇빛 속에서 가느다란 어둠의 선을 잇대며 축축한 슬픔 쪽으로 향하고 있다. 이른바 연민이 이끄는 방향일 것이다. 그 방향은 순간으로도 머물지 않는 생명의 시간이 나타낸 그래프다. 흐르고 변하는 것들, 붙잡을 수 없는 것들, 시간의 흔적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 흔적들은 때로 아프고 아스라하다. 온몸을 비비고 지나갔던 생이 순간순간 머물렀던 자리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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