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을 마무리하며
지난 금요일, 조금씩 남아있던 가을재배 작물들을 모두 거두었다. 사용기간이 정해져 있는 공공텃밭 일정이 끝이 난 셈이다. 한차례 추위가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작년보다 따듯한 날씨 속에 마무리되었다.
하룻밤 추위에 바짝 말라버린 가지대만 보면 늦가을의 정취지만,
얼갈이를 캘 때는 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얼은 겉잎에 아랑곳하지 않고 새잎이 뽓뽓이 다시 올라온 얼갈이배추. 온화한 대기와 쪼그리고 앉은 이의 등을 따끈하게 데워준 햇살이 봄동 캐는 아낙네 기분을 불어넣었다.
내친김에 여름으로 갔나.
텃밭 모범인 금화 씨가 나누어준 초록무 모종이 이루어낸 가을은 여름의 싱그러움을 두르고 있다. 알고 보니 과일무라는데 반찬보다는 우적우적 그냥 씹어먹기 알맞다.
아쉬운 시금치가 있다.
늦게 심어 추위에 얼고 녹으며 단맛을 들일 수 있는데 그만 뽑아야 했다. 사실 이번에 그냥 한번 씨를 뿌려본 건데 의외로 잘 컸다. 남의 밭에서 아무리 푸짐해도 내 밭은 늘 의심의 장소다. 날까?? 조물조물 무쳐 조갑지 같은 접시에 딱 한 접시.. 내년을 기약한다. 일찍 제대로 심어 보리라.
김장무 다섯 뿌리, 김장 배추 세포기도 있다. 처음에 물만줬지 일체의 거름이나 비료를 주지 않고 그냥 자라게 했다. 그나마 제일 컸던 무우를 잘라보니 바람이 들어 중간이 뻥 뚫려 있고 심지 같은 게 박혀 있었으며 맵기까지 하다. 푸른 잎이 사분의 삼인 배추는 어찌나 단단하던지 넓적한 줄기 조각이 (거짓말 조금 보태서) 얇은 합판 느낌이었다. 얼마나 스스로를 단도리하며 컸으면. 이것들을 무는 깍둑썰기하고, 배추는 조각을 내어 따로 김치를 담았다. 깍두기와 배추김치가 작은 통에 한통씩 나왔다. 맵고 질긴 이들을 순화시키는 방법은 발효뿐이겠만, 숙성이 된다고 맛있는 김치가 되지는 않겠지만, 야생초 닮은 성질이 낼 수 있는 맛이면 되지 싶다. 기운을 먹으련다.
바쁘고 푸짐했던 봄재배와는 달리 이번 가을 재배는 조금 느긋하고 단출했다. 한해에 두 번을 애쓰기는 조금 부담되었다고나 할까. 재미로 가꾸는 텃밭일의 한계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주어진 땅은 소중해 이것저것 씨앗을 뿌리고 이웃에게 모종을 얻어보기도 했다. 소득에 대한 기대감은 없지만 자라는 걸 심어놓은 밭은 그냥 바라보고 마음을 쉬기에 좋은 아지트였다. 게을러지기 쉬운 일상을 성실하게 만드는 일거리 제공터 이기도 하다. 넘치지 않아 무엇이든 버리지 않고 먹었다. 진딧물 사체로 회색빛이 된 배추 속을, 애벌레가 먹은 이파리를 씻고 씻어 토장국을 끓이고 잘게 썰어 바싹한 전을 부쳐 본다. 음, 꼬솝네. 가지는 새끼손가락만 한 것까지 따서 구워 양념을 얹어본다. 오, 달큰하네. 마치 어디까지 먹을 수 있나 실험하듯 놀이하듯... 암만 봐도 먹을 게 없어 보이는 헐렁한 텃밭을 그렇게 드나들었다. 소꿉놀이였다! 주변에 있는 자연물로 무엇이든 뚝딱 만들어 진짜처럼 연기하는 소꿉놀이. 실컷 차려놓고 누가 부르는 소리에 휙 털고 일어나도 아쉬울 거 없는 소꿉놀이 살림. 그런 텃밭을 소망했었나?
브런치 글쓰기 5년 차, 홀로 꺼져가는 촛불 신세였던 글쓰기 생활에 텃밭일은 마중물이 되었다. 몸을 움직이고 자라는 것을 보는 데 왜 할 말이 없을까. 단순한 생활자에겐 자극이다. 쉽고도 어렵게 발행한 올해 글들은 텃밭글이 연결한 것들이다. 왜 글을 쓰나, 또 묻는다. 소꿉놀이 안에서 아이들은 무엇이든 마음껏 되고 해 볼 수 있는 자유가 있다. 알고 있는 단어들을 엮어 생각을 적어보는, 나아가 그 생각이 어떤 울타리를 넘어 발견의 기쁨을 맞는 일도 이를 닮았다. 오롯이 내가 되는 시간, 그러면 수시로 찾아오는 * '밤앓이' '덧없음' '힘없음' 같은 그림자들을 보듬을 수 있다. 끔찍한 세상일에 문을 닫지 않을, 돌봄이 필요한 주변에게 몸을 내어줄 연민을 유지할 수 있다.
봄재배의 풍성함과 가을재배의 소박함을 담았던 5평 텃밭. 사람의 일 텃밭은 휴식에 들어가겠지만 땅과 땅속에 깃든 생명은 쉼이 없다.
* 그림책 <오필리아의 그림자 극장>에서 가져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