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계영 Oct 11. 2024

땅콩이랑 까치랑

늦깎이 땅콩 이야기를 했었다.

김장 배추가 자라지 않는 가을 텃밭은 썰렁하여, 그나마 땅을 메워주고 있는 수북한 땅콩 잎들이 있어 모양새가 유지되고 있다는. 지켜보는 눈들에게, 포기하지 않고 그래도 가고 있어요,라는 메시지를 품고서 말이다.

맨발 걷기를 하던 텃밭 농사 달인 g아파트 어르신은, 아직 땅콩이??,라는 말 한마디 던지고는 가던 길 간다. 공공텃밭 안에서 먹거리와 운동, 사교까지 해결하는 알토란 텃밭 어르신의 행보는 언제나 거침이 없다.


아직 땅콩이, 그럼에도 땅콩이라 줄기에 붙은 알맹이가 삐죽삐죽 보였을 때 놀랍고 반가웠다. 땅속에 얼마나 주렁주렁 이면.. 기대 안 한다는 말은 빈말, 희멀그레한 쭉정이 땅콩이라도 조랑조랑이니 좋았다. 한 개 따서 까보니 정말 속이 비었거나 알이 들어도 진짜 아기처럼 작고 하얗다. 기다리자, 기다리자, 잎에 까만 점이 생기고 누렇게 될 때까지. 겉으로 열매가 드러나지 않는 것들은 잎 상태를 보며 수확 때를 가늠한다는데, 어인일인지 142번 밭 땅콩잎은 쉽사리 변하지 않고 덤불만 커져가는 중이다. 그래도 괜찮았다. 늦으면 어때, 늦어도 좋아, 주렁주렁 많이 열리려 시간을 버는 거겠지. 저거라도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 그래, 땅도 시간도 많으니 천천히 뿌리를 뻗으며 알맹이를 만들어 보렴.


한날 갔다가 땅콩 껍질이 덤불 주변에 어질러져 있는 걸 보고 조금 놀랐다. 자세히 살펴보니 땅을 제법 헤집은 흔적이 있다. 도대체 누가?,라는 생각이 번뜩 들었지만, 설마 사람이 그랬겠어..라는 생각에 이르자, 그럼 어떤 동물이? 멧돼지? 고라니? 야생쥐? 두더지? 너구리?

그러면 할 수 없는 일 아닌가! 기대도 쉽고 체념도 쉽다. 까짓 거 나눠먹지 뭐. 어차피 수확을 기대하고 심은 게 아니니, 먹어라 먹어. 이 마음이 좀도둑에게 전해졌나 보다. 나날이 땅콩 고랑에는 뿌리들 맨살이 더 드러나고 껍질 조각들이 낭자했다.


그분, 관리인께서 알려 주었다.

까치란 놈이 그러고 있다고. 그물을 덮어 씌워요! 세상에나, 전혀 예상치 못한 제3의 동물이다. 농작물을 아작내고 있다는 물까치 소문을 들은 바 있지만, 이런 경우로구나. 까치 소행을 알아차리자 주변 까치들이 쑥 눈에 들어온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던 것들이. 밭에서 휙 날아오르는 까치들, 반대로 밭에 내려앉아 어슬렁거리고 있는 까치들, 늘 밭과 함께 있었던 거다!


저기 텃밭 근처 전깃줄에 앉아 텃밭 쪽을 오매불망 바라보고 있는 까치들이 있다. 거의 유일하게 남아있는 142번 땅콩밭을 탐하고 있는 것일까. 오늘따라 저 아줌마 왜 저렇게 오래 있지? 자꾸 우리 쪽을 보는 것 같지 않아. 자주 안 나타나 좋았는데, 요즘 매일 어설렁거리더라. 사실 땅콩이 저기뿐이라 먹어주지, 저거 농사 잘못 지었어.. 쭉정이가 더 많아. 맞아 맞아!

울타리도 땅속도 아닌 공중에서 내려오니 어찌 막아낼 방법이 없는 존재들. 그래, 옜다, 내가 땅콩을 먹으려 한 게 아니고 사랑하는 토마토를 실하게 만들어 준다 하여 심어 본 것이니 더 좋아하는 너희들이나 먹을 때까지 먹어봐라. 난 처음이니 노란 잎사귀에 까만 점이 생길 때까지 기다려 볼란다. 마지막으로 까치들을 힐끔 한번 더 봐주고는 밭을 걸어 나왔다.


다음날 생각이 바뀌었다. 땅콩이 아까워서가 아니고 주변 눈들이 신경 쓰여서다. 요즘 주변 밭들은 빗자루 자국이 남아있는 한옥 마당처럼 정갈하여 밥알이 흘러도 주워 먹을 수 있을 정도다. 그 사이 흙이 파헤쳐지고 땅콩껍질이 흩뿌려진 밭이라니. 또 전화 올지 모른다. 도대체 어떡하실 거예요? 빨리 수확하세요! 네에.

쭉정이 반, 또 거기서 반은 까치 부리에 찍힌 것..


요만큼 수확했습니다! 경상도식 땅콩 먹기를 했다. 꽉 여물지 않은 것을 물에 삶아서 먹는 것이다. 근데, 이 땅콩 좀 맛있다. 껍질 무늬가 희미한, 그래서 속이 덜 여문 알맹이는 부드럽고 달큰하며, 제법 붉은색을 띤 것은 단단하여 고소하다. 여름부터 물 주고 지켜본 땅콩을 가을에 까먹다니, 채소와 다른 기분이 든다.





마침내 가을.. 까치들은 텃밭 작물 먹고 자라고, 작물들은 아침 이슬 먹고 자라나 보다. 습관처럼 아침에 물 주러 갔다가 촉촉이 젖은 땅과 물기 서린 잎들을 발견하면 머쓱해지나, 작은 경이감이 든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 언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