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 이웃은 멀지도 가깝지도 않다.
행인 1이었다가 어느 날은 수다삼매경의 파트너가 되기도 하니.
이런 텃밭 이웃들이 요즘 나의 쪽파밭을 보고 감탄 비슷한 걸 하며 쓰다듬고 간다. 잘 되었다고, 잎 끝이 누래지지 않고 깨끗이 잘 자랐다고. 거름을 뭘 줬어?
142번 밭에서 유일하게 성장하는 것이라 그려려니 했는데, 쓱 다른 밭들을 둘러보면 이런 말을 들을만하다(흠흠..). 밭마다 배추 모습이 다르 듯 쪽파도 달랐다. 배추야 생장 기간이 길고 여러 변수가 있어 그렇지만, 간단한 쪽파에게 달라질 일이 뭐가 있을까. 듣는 쪽파 기분 좀 그러네요, 우리도 나름 예민하다고요! 바질의 예민함에는 비할바가 아니지만요..
그래서 쪽파의 나날이다.
하루가 다르게 커가고 있는 이것들을 텃밭에 갈 때마다 뽑아오고 있는데, 쪽파는 이름처럼 쪽이 갈라지는 ‘파’이지 않나. 한 뿌리에 달려있는 여러 쪽을 나누어 다듬는 일이 밭에서 뽑아온 것을 먹기 위한 첫 통과의례다. 뿌리를 통으로 싹둑 자르면 나누어지는 파 가닥들, 을 한 개씩 잡고 가장 아래쪽 잎을 꺾어내려 비늘껍질 벗기기.
쪽파를 밭에 심을 때 이 단순 노동을 생각지 않고 재배했다면 낭패다. 단순하고 귀찮고 피해 갈 수 없는 일이 눈앞에 더미로 쌓일거니까. 앉은뱅이 의자에 앉아 손끝에 집중할 시간을 가져야 쪽파는 비로소 음식 재료가 된다. 구부리고 앉은 몸이 쪽파향에 잠기는 시간이다.
까고 까고 또 까고. 심지어 일이 끝이 보일 땐 살짝 아쉽기까지 하는 중독성이 있다. 차마고도 소금밭을 일구는 여인의 무념무상까지는 아닐지라도 여기저기 얽혀있던 일상을 잠시 숨 고르기 하며 한 곳으로 정리하는 활동처럼 느껴진다. 오로지 쪽파를 까고 씻고 반찬을 만드는 일만이 나의 일인 듯 하나씩 나타나는 결과물을 향해 온 신경이 집중되고 몸은 계속 움직인다.
그러나 내가 사라진 듯한, 생각이 줄어든 대신 몸이 피로해진 생활인에게 공허감같은 것이 슬쩍 고개를 든다. 이젠 뭐라도 읽고 끄적이고 싶다. 읽고 쓰는 일은 지속적으로 평온하게 유지될까. 또 쪽파를 까야하는 때가 오기 마련이다. 일상의 균형 잡기, 올 가을은 단품목 쪽파 까기로 어쩌다 애쓰고 있다.
나날이 굵어질수록 까는 이의 눈물까지 쏙 빼 가는 쪽파에게 이유는 묻지 않으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