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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영 Apr 14. 2020

4월이 4월에게

                 2014년 4월 21일


교육대학 담벼락을 지나 집으로 돌아오며 생각했다.

' 현이도 그냥 교대 다녔으면 좋았을 걸... '

이 무슨 욕심이란 말인가!

자식을 늘 곁에 두고픈 마음.


<염소 시즈카>에서 떠나는 새끼 염소를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울부짖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뒤돌아 풀을 뜯는 어미 염소 시즈카를 얼마나 칭송하고, 나도 저렇게 되어야지 했었는데...


<세상에서 제일 힘센 수탉>에서 언제까지나 자식보다 힘이 세고 싶은 늙은 수탉의 욕심이 몸서리치게 탐욕스러워, 나이 들어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 결심하고 있는데...


오늘 내 마음을 보니 어쩌면 생각한 대로 사는 게 어려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20분남짓 걸어 막다른 골목에 고즈넉이 앉아있는 집에 들어서니 뭐가 횅하다. 

두식구 밥만 간편히 챙겨 먹고, 천천히 몸을 씻고, 사온 책들을 읽을 생각 하니...  갑자기 기분 좋아졌다.

아무도 날 방해하는 사람은 없다.


일터 '책과 아이들'에서 벼르다 사온 책들을 펼쳐본다.

백석 시집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그리운 메이 아줌마>, <천천히 깊게 읽는 즐거움>.


호젓해서 오히려 마음이 꽉 찬 밤이다.

간간이 들려오는 강아지 '정이'가 짖는 소리는 더 채울 뿐이다.


백석 시집을 먼저 잡아 시 한 편을 옮겨보기도 하고


 박각시 오는 저녁


 당콩밥에 가지냉국의 저녁을 먹고 나서

 바가지꽃 하이얀 지붕에 박각시 주락시 붕붕 날아오면

 집은 안팎 문을 횅하니 열어젖기고

 인간들은 모두 뒷등성으로 올라 멍석자리를 하고 바람을

쐬이는데

 풀밭에는 어느새 하이얀 대림질감들이 한불 널리고

 돌우래며 팟중이 산옆이 들썩하니 울어댄다

 이리하여 한울에 별이 잔콩 마당 같고

 강낭밭에 이슬이 비 오듯 하는 밤이 된다.


언젠가 본 <박각시와 주락시>라는 동화가 백석의 이 시를 보고 모티브를 얻었다고 하던데, 바로 이거였구나!

몇 가지 모르는 낱말들을 찾아봐야 더 이해를 할 것 같지만 그냥 읽어도 아름다운 한여름 밤 풍경이 오감을 자극한다.



공책을 정리하다 발견한 일기다. 큰 아이가 학교를 위해 서울로 떠나고 허전한 마음이 들었었나 보다. 처음 어린이집 갈 때, 고등학교 기숙사로 떠날 때도 비슷한 마음이었다. 느닷없이 수도권으로 이사 오는 바람에 다시 함께 살고 있지만 언젠가는 또 떠날 아이라는 걸 안다.


봄이면 요동치는 감정은 그때나 지금이나 4월의 모습과 닮았다. 꽃도 피고 조금 걸으면 몸이 후끈해지는 완연한 봄 같지만 가만히 있으면 서늘해지고, 나가면 바람 때문에 옷깃을 여미게 되고, 해 떨어지면 춥기까지 하니 말이다. 봄은 봄이로되 아직까지 언제나 따뜻하고 너그러운 봄은 아니다.


사람도 계절도 내 마음 같지 않으나 책과 글쓰기는 언제나 내 편이다.

그날 밤 허전한 마음을 책이 달래주었 듯, 사회적 거리두기가 한창인 이번 4월은 브런치 글쓰기가 좋은 친구가 되어주고 있다. 아니, 관계를 가볍게 하는 나에겐 친구 이상이라고 해야 할까. 그동안 글쓰기가 깊은 산골짜기 메아리 없는 외침이었다면 브런치 글쓰기는 어디선가 희미한 메아리가 뜻밖에 들려온다. 흥분되고 멋진 일이다. 메아리들은 형체가 없지만 잔잔하게 날 위로하고 격려해준다.

그래, 글 계속 써도 돼


70넘은 어르신도, 희한하게 취향이 같은 남성도, 젊은 여성도, 과일 파는 아저씨도, 알고 보니 독서모임 동료도... 머물진 않지만 모두 글을 쓰며 온기를 주고받고 있는 것 같다.

'브런치'라는 새로운 우주가 2020년 봄에, 잔인한 달 4월에 팽창하고 있다.

지나온 4월들이 나에게 준 선물이라 나좋을대로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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