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드 보통의 ‘일의 기쁨과 슬픔’ 중에서
‘기원전 4세기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만족과 보수를 받는 자리는 구조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고 말했으며, 이런 태도는 그 이후 2천 년 이상 지속되었다.’
보수를 받기 위한 일을 하면서 만족을 느낄 수는 없다고 유명한 철학자가 말했다. 경제적인 요구는 사람을 노예나 동물과 같은 수준에 놓는 것이다. 사람은 결코 노동을 하면서 즐거울 수 없다는 것이다. 노동은 노예나 하는 시대였다. 그러나 노예가 사람보다 훨씬 많았다.
‘초기 기독교는 일의 괴로움이 아담의 죄를 씻는 데 어울리는 확고부동한 수단이라는 더 어두운 교리를 보탰다.’
선악과를 먹는 큰 죄를 지어 에덴동산을 쫓겨날 때 힘들여 일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는 천벌을 받아 수천 년 아니 수십만 년 동안 우리는 일해야만 했다.
‘18세기의 부르주아 사상가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공식을 뒤집었다. -중략- 보수를 받는 일에서도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산업혁명과 정보혁명을 지나면서 일해야 한다는 것은 신념이 되어버렸다. 직업선택이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한다.
많은 자기 계발서나 학교에서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직업으로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과연 직업이 될만한 좋아하는 일이 얼마나 있을까? 좋아하는 일이지만 최저생계비도 안 되는 수준의 일이라면 누가 만족할 수 있을까 싶다. 그리고 좋아하던 일이라도 그것이 직업이 되어 생계유지의 방법이 된다면 즐겁지 않을 확률이 높다.
정년보장이나 평생직장이 박물관에 전시되고, 수명은 한정 없이 늘어나고 있는 지금, 자발적이거나 비자발적인 많은 은퇴 예정자들은 정답도 없고 보기조차 없는 주관식 문제를 풀기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다. 언제까지 무슨 일을 할 것이냐를 놓고...
직업이 무엇이냐고 묻는 영어 표현 중에 내 기억에 강하게 남은 것이 있다. 그래서 외국인을 만나면 난 이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 What do you do for living?”
살기 위해 꼭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만큼 했으니 이젠 그만하면 안 되나? 일 안 하는 노후를 버틸 충분한(?) 연금, 임대소득, 금융소득이 없다면 살기 위해 일을 해야 한다. 이 사회와 가족의 짐이 되지 않으려면...
‘할 일이 있을 때는 죽음을 생각하기가 어렵다. 금기라기보다는 그냥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긴다. 일은 그 본성상 그 자신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진지하게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면서 다른 데로는 눈을 돌리지 못하게 한다. 일은 우리의 원근감을 파괴해버리는데, 우리는 오히려 바로 그 점 때문에 일에 감사한다.’
결국 일을 계속하면 죽음을 기다리는 공포의 시간을 줄일 수 있다. 일하다 죽는다면 그보다 좋을 수 없을지 모른다. 회사에서 장례를 치러주고, 직원에 대한 사망보험금과 위로금이 가족에 대한 마지막 선물이 되어 훌륭한 아버지로 기억될지도 모른다.
참고: 알랭 드 보통의 글은 많은 은유와 비유로 넘쳐나 어떤 때는 이해 못할 수식어로 짜증이 폭발할 때가 있다.(번역 문제라기보다는 내가 유럽인이 아니기 때문일 확률이 높다) 이 책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 상태에 도달하지 않을 만한 시간을 쓰고 싶다면 4장, 8장, 10장 만을 읽을 것을 강추.
표지사진: 프놈펜의 뚜엉 슬랭 Genocide Museu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