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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거니 Mar 13. 2020

한라산 백록담 등반기

존재를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가래가 끓어 나온다.
허파 깊숙한 곳에서 담배 타르와 미세먼지들이 솟구쳐 나온다.

성판악에서 7:30 등반 시작한 지 30분 정도 지나자 숨이 차오른다. 깊은 곳에 웅크리고 있던 이물질들이 힘들다며 끓어 나오기 시작한다. 등반을 시작하면 항상 마음이 급해진다. 빨리 정상을 밟아야 한다는 조급함이 발길을 재촉한다. 굳이 정상을 밟지 않아도 되는데... 정상이라고 특별한 것도 이 나이엔 별로 없는데.

대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고등학교 친구들이랑 한라산 정상을 1박 2일로 처음 밟았다. 백록담에서 무수한 올챙이를 보았다. 한 여름에 아직 올챙이가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곧 가을인데 개구리가 되기는 하는 것일까란 의문이 들었다. 대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는 대학교 친구들이랑 정상을 밟았다. 그래서 한라산 정상은 매년 가는 곳이란 생각을 했다. 그렇게 항상 쉽게 갈 수 있는 곳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지난 41년간 제주도를 무수히 갔지만 그 이후에는 한 번도 한라산 정상을 밟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아침에 일찍 일어나 온전한 하루를 다 바쳐야 하기에(이제는 산에서 잘 수 없다), 다른 좋은 곳도 많은데 굳이 힘들게 오르기 싫었던 것이다.

3월 첫 주 목금토에 교회 수련회가 잡혀 있었다. 개강 첫 주 목요일 오후에 수업하고 저녁에 제주에 도착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금토 이틀 동안 교회 차량위원회 집사님들과 함께 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코로나 때문에 수련회는 취소되고, 나는 비행기표를 취소해야 했다. 코로나 때문에 개강이 2주 연기되어 첫 수업도 연기되었다. 심지어 개강 후에도 2주는 대면 수업을 하지 말란다. 동영상 강의를 하란다. 갑자기 3월이 한가해졌다.

비행기표 취소를 망설였다. 취소수수료가 있다는 것도 알았다. 한라산 등반에 관하여 인터넷을 찾아보았다. 등반객 인원을 통제하기 위해 한라산을 오르려면 국립공원에 미리 예약을 해야 하는데 코로나 때문에 당분간 예약 필요 없단다. 사람이 없다는 얘기다. 이때가 기회란 생각이 든다. 호젓하게 한라산을 오를. 이 생에선 마지막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날씨를 확인하니 금요일 날씨도 구름 약간이다. 이렇게 완벽할 수가... 취소된 교회 수련회 대신 나를 위한 순례길이 마련되어 있는 것 같았다.

항공사에서 전화가 왔다. 내가 예약한 비행기 편이 결항되고 30분 빠른 비행기 편으로 내 예약이 이전되었단다. 지금은 수수료 없이 취소할 수 있단다.

그냥 가겠다고 했다.

목요일 저녁 7시에 제주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 픽업 나온 조카와 바로 초밥집에 갔다. 깨끗한 초밥집에 손님이라고는 우리 둘 밖에 없었다. 조카는 가족과 떨어져 제주에서 개업하고 있는 의사다. 조카 집에서 잤다. 다음 날 아침에는 성판악까지 태워다 주었다. 내려오면 전화하라며...

성판악 주차장은 해발 750미터에 있다. 아침 7:30의 싸한 공기를 마시며 사람들이 등반을 시작한다. 나도 등산화 신발끈을 조여 매고 그들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구름 한 점 없던 하늘에 점점 구름이 끼기 시작한다. 저녁에는 비가 온다고 했다. 빨리 정상을 밟아야 한다. 점점 숨이 찬다. 가벼운 배낭이지만 등에서 땀이 맺히는 것이 느껴진다. 해발 1500미터의 진달래밭 대피소를 12:30 이전에 통과해야만 정상을 오를 수 있다는 안내판이 중간중간에 여러 번 있었다. 아직 시간은 충분하다.

진달래밭 대피소가 얼마 남지 않은 지점에 사라오름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사라오름까지는 600미터이고 왕복 40분 걸린단다. 선택의 순간 망설여진다. 정상에서 하산길은 관음사길로 마음을 정하고 오르는지라 하산길에선 기회가 없다. 시간과 체력을 쓸 만큼 좋은 곳일까?  '사라'란 명칭이 마음에 든다. 여기를 올 기회가 다시없을 것 같다.  

사라오름에는 호수가 있었다. 제주의 남쪽 바다로 향한 전망대에선 바다는 안 보이고 끝없는 구름의 바다가 보인다. 옆으로는 한라산 정상이 보인다. 사라오름 왕복 30분 동안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갈길이 모두 바쁜 사람들만 한라산을 오르나 보다.

진달래밭 대피소에서 간식을 하고 정상을 향하는데, 어라 눈길이 나오네. 아이젠을 분명히 서울에서 챙겼는데 아무리 배낭을 뒤져도 아이젠이 없다. 아이젠이 없어 여기서 그만 하산해야 하나 하고 고민했다. 그러나 날이 따듯하여 눈길이 슬러쉬다. 등산 스틱으로 양쪽을 찍고 쩍쩍 붙는다는 등산화로 오를만하다.    

드디어 정상이다. 백록담은 얼음에 뒤덮여 있고 접근금지다. 1950미터 정상 표지석은 없고 백록담 표지석만 있다. 백록담 표지석과 함께 사진 찍기 위해 줄이 길게 서 있다. 줄 서는 것은 질색이다. 다른 사람에게 찍어 달라고 부탁하는 것도 별로다. 줄 서지 않고 비스듬히 셀카를 찍었다. 정상은 구름 위다. 신선이 된 것이다. 이 순간을 오래 즐겨야 한다. 구름의 바다인 운해를 보며 한참 앉아 있었다. 배낭에 챙겨 온 먹을 것들을 깨끗이 뱃속에 넣었다. 많은 사람들이 컵라면과 김밥을 먹고 있다. 컵라면을 위한 보온병까지 챙겨 온 것이다. 난 아이젠도 챙기지 못했는데...

하산 시간이 오후 두 시임을 큼지막하게 걸어 놨다. 네댓 시간 정도의 하산 시간이 소요되니 어둡기 전에 도착하려면 두시에는 출발해야 한다. 오후 1:10에 하산하기 시작했다. 관음사 쪽으로. 발걸음이 잘 안 떨어진다. 이렇게 힘들게 오른 것을 다 내려놓아야 하다니. 하산길에서 제주시와 바다가 보인다. 스모그가 얇게 그리고 낮게 깔려 있다. 해발 1200미터 까지는 눈길이 많았다. 아이젠 없이 내려오는 길은 오르는 것보다 훨씬 힘들었다. 무릎에 무리가 가는 것이 느껴진다. 지루하게 길고 힘든 길이었다. 아마 무릎 때문에 더 고통스럽게 느껴진 것이리라. 무릎이 너무 아파 차라리 잠깐 나오는 오르막이 낫다. 성판악 길에 비해 사람들도 별로 없다.

절뚝거리며 간신히 관음사 입구 야영장에 도착했다. 오후 6:10 꼬박 5시간 걸렸다. 편의점 들러 이온음료 한 병을 다 들이켰다. 내가 거의 마지막 하산객이었다. 어둠이 몰려들고 있다. 편의점 셔터도 내리고 있다. 조카를 기다리는 십여분 동안.

한라산 정상을 등반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 나도 그중의 하나였다. 왕복 11시간 18.3 킬로미터(38,000보)를 평지도 아닌 산길을 그렇게 힘들게 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존재를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내가 과연 실존하고 있는지. 산 것인지 죽은 것인지 어중간한 목숨 부여잡고 살고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갈림길 선택의 순간 망설인다
왼쪽은 서귀포쪽 바다 오른쪽은 한라산 정상
정상 백록담 표지석
하산길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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