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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거니 Jul 31. 2020

제주도 올레 17길

무의미한 경험일까?



올레 17길은 광령리에서 시작한다.

16길의 끝과 17길의 시작은 평범한 마을 동사무소 앞 도로다. 시작과 끝에 대한 집착이 없다면(그런 사람 매우 드물지만) 올레 17길을 무수천 버스정류장에서 시작하면 편하다. 물이 없어 무수천이라 이름 붙은 개천은 당연히 바다로 향한다. 넓은 천변 길이 바다 쪽으로 나있다.

제주도의 긴 장마(2020년 올해는 유난히 길었다)가 어제 막 끝나 무수천에는 물이 제법 많았다. 심지어 작은 폭포와 물이 고였다가 흘러 나가는 소(연못)도 있다. 오늘은 다수천이다. 시간은 오후 두 시. 작열하는 태양 아래 챙이 큰 모자와 양산대용인 우산을 쓰고 물소리를 들으며 걷기 시작했다. 무척 경쾌하게. 무수천을 건널 수 없어 우천 시 사용한다는 우회도로를 걷기도 했다. 31도가 넘는 기온에 장마 직후의 습하고 더운 바람이 불었다. 무수천변 길이 끝날 즈음에는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갑자기 회의감이 몰려온다.

‘이 더위에 내가 지금 모하고 있는 거지?’
순례길을 걷고 있잖아.
‘무엇을 위한 순례지? 내 영혼을 구원해 달라는?’
건강하게 잘 먹고 잘 살다 천국가게 해달라고 해.
‘그런 뻔뻔한 기도를 내가 한다고? 기도하면 누가 들어주냐?’
너 세례 받은 기독교인이잖아. 주일마다 교회 나가서 봉사랍시고 주차관리도 매주 했잖아.
‘지금은 아냐.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읽은 후에 개종했어. 아니 탈종 했어. 성경보다 머리에 쏙쏙 들어와. 세 번째 통독 중인데 아직도 깨달음을 통한 환희를 맛보고 있어. 올레길을 이 더위에 걷는다는 것은 무의미한 경험 중에 하나 아닐까?’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니? 의미란 인간들의 상상일 뿐이야.

올레 17길은 세 부분으로 구별 지을 수 있다. 무수천변길, 해안도로, 그리고 공항 주변을 걷는 것이다. 해안도로는 제주도의 가장 흔한 풍경길이다. 다른 해안도로와 차이가 있다면 일몰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과 카페나 음식점 등의 인프라가 아주 풍성하다는 것이다.

해안도로 중간에 도두항과 도두봉이 있다. 해발 60미터인 도두봉은 본능적으로 패스했다. 공항이 가까워 뜨고 내리는 비행기들이 소음과 함께 시야에 들어온다. 기체가 연한 하늘색으로 칠해진 가장 익숙한 항공사의 비행기 바닥은 완전 하얀색이다. 하얗고 통통한 비행기 배를 올려다본 순간 중학교 생물시간에 해부했던 개구리 배가 생각난다. 무려 49년 전이다. 선생님이 통에 넣어 에테르로 마취시킨 개구리를 조별로 한 마리씩 받았다. 코르크 같던 판에 늘어진 개구리를 뉘어 핀으로 네 발을 고정시키고 핀셋으로 항문 주변을 살짝 들고 가위 끝을 항문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그 하얗고 예쁜 배를 갈랐다.

경험과 의식이 인간 개인의 아이덴티티를 규정한다. 경험이란 데이터베이스는 비슷할 수는 있어도 다 다르다. 경험에서 만들어지는 의식이 개인마다 다른 이유다. 올레 17길을 걷는다는 것은 내 데이터베이스에 하나의 경험을 추가하는 것이다. 추가되었지만 향후 의식화 과정에 전혀 사용되지 않는다면 올레길을 걸은 경험은 무의미한 경험일 뿐이다.(https://brunch.co.kr/@jkyoon/300​ 참조)

7시가 가까워 오자 저녁노을이 장관이다. 구름 사이로 황금빛을 뿜고 있다. 몸은 완전히 땀에 절었다. 아직도 기온은 별로 내려가지 않았다. 오늘 밤도 열대야에 틀림없다. 공항로에 점점 가까워 오며 올레길이 끝나간다. 오늘의 경험도 끝나간다. 이제는 저녁을 먹어야 할 것 같다. 주로 단체손님을 받던 횟집들은 썰렁하다. 횟집 두 개 중에 하나는 문을 닫았다. 혼자 횟집에 들어가기를 망설이며 걷고 있는데 건물 지하에 위치한 해물라면 가게가 눈에 들어온다.

지하로 내려가니 일식집 다이가 있고 테이블이 세 개 있는 아담한 라면가게다. 다이에 앉아 컴퓨터 화면을 보고 있던 주인아저씨가 나를 보더니 다이의 대각선 옆 자리를 권한다. 일단 맥주부터 달라했다. 라면 말고는 일본식 덮밥이 있어 문어 덮밥을 주문했다. 나보다 대여섯 살 젊어 보이는 주인아저씨가 심심했던지 아니면 혼자 여행하는 내가 궁금했던지 자꾸 말을 건다. 그렇잖아도 5일째 비자발적 묵언수행 중이라 살갑게(?) 대꾸했더니 아저씨가 신나서 많은 이야기를 쏟아낸다. 정치, 경제, 사회 모두. 대화의 소재를 바꿀 때마다 아저씨는 공손하게 “어르신도 아시겠지만...”이란 접두사를 붙인다. 어르신이란 소리를 들을 때마다 왠지 낯설다. 자꾸 듣다 보면 곧 익숙해지겠지 했는데 영 아니다. 이제는 인사하고 가야지하며 일어서는데 내가 자신의 작은 아버지를 꼭 닮았단다. 그러면서 20년 넘은 가족모임 사진을 내게 들이민다. 사진 속에는 훤칠한 키에 앞이마가 훤한 어르신이 사진 속 인물들 중에서 돋보인다.

그래 난 드디어 결국 어르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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