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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타고니아의 서쪽은 안데스 산맥이다.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서풍이 산맥을 넘으면서 비를 뿌린다. 건조한 바람이 파타고니아의 거칠 것 없는 초원지대를 맹렬하게 동쪽으로 달린다.
손바닥만 한 엘 칼라파테를 벗어나자 왼쪽 하늘이 훤해지기 시작한다. 오른쪽에서 부는 바람을 맞아 차가 휘청거린다. 곧게 뻗은 도로에는 아무것도 없다. 아주 간간이 큰 트럭과 마주칠 뿐이다. 리오그란데나 우슈아이아에서 되돌아오는 트럭이라고 생각했다. 폭스바겐 제타에 크루즈와 차선 유지 기능도 있다. 졸지만 않는다면 운전하기는 일도 아니다. 10초마다 핸들을 잡으라는 삐삐 거림만이 바람소리 속에서 나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는 것 같다.
아버지는 운전하다 죽고 싶단 말을 한 적 있다. 운전할 수 있을 때까지만 살고 싶단 말이기도 했다. 그때 누나가 그랬다. “미쳤어? 외국에서 여행하다가 길에서 죽으면 누구더러 치우란 거야? 나랑 지훈이 무슨 고생시키려고. 이제 좀 집에 가만히 있으면 안 돼?” 아버지는 그때 싱긋 웃기만 하며, “그런가?” 했다.
지루한 길이 계속되고 있다. 목장의 경계인 것 같은 철조망들이 자주 보인다. 햇볕이 잘 드는 작은 언덕 한쪽에는 바람을 피해 수 백 마리의 양 떼가 웅크리고 있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 초원이 점점 눈에 익숙해져 간다. 네 시간 반 정도 운전하여 국경에 도착했다. 아르헨티나와 칠레는 매우 긴 국경선을 갖고 있다. 이 국경선을 확정 지은 것은 사실 최근이다. 국경을 넘나드는 사람들이 제법 많아 국경검문소의 시스템은 비교적 잘 갖추어져 있다. 줄 서거나 기다리는 시간이 생각보다 적었다. 개인 배낭을 포함한 모든 짐은 엑스레이 장비로 일일이 확인하고 있다. 특히 곡물이나 과일의 이동을 엄격히 통제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잘못한 것도 없고 문제 될 만한 소지품도 없지만 짐 검사를 당할 때는 괜히 가슴이 두근거린다. 제복을 입은 세관원이나 입국심사를 하는 이민국 직원을 보면 주눅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주눅 들라고 제복을 입히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칠레로 넘어왔지만 초원은 같다. 바람은 더 거세게 불고 있다. 마젤란 해협을 향해 차를 몰았다. 마젤란 해협은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다. 해협 건너편은 티에라 델 푸에고란 큰 섬이다. 해협을 건네주는 3대의 페리선이 30분 간격으로 운행되고, 페리의 이동시간은 약 50분이라고 누나가 새벽에 카톡을 보내왔다. 대항해 시대 마젤란이 이 해협을 통해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나아갔다. 결국 필리핀에서 전사했지만...
드디어 선착장이 보이기 시작한다. 선착장에 늘어선 자동차들의 줄이 500미터는 되는 것 같다. 뭔가 좀 이상하다. 일단 줄 제일 뒤에 차를 세우고 차문 손잡이를 연 순간 바람에 문이 날아갈 듯 열린다. 밖에 나와 있는 사람은 없다. 이 바람에 일없이 몸을 맡길 까닭이 없다. 앞에 오래된 도요타 랜드쿠르저가 서 있다. 운전석에 앉아 있던 어르신이 나를 보더니 창문만을 조금 열고 이 상황을 설명해준다. 바람 때문에 페리의 운항이 두 시간 전에 중단되었고 사람들이 페리가 다시 운항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어쩌면 여기서 밤을 새워야 할지도 모른다고.
바람을 뚫고 좀 더 앞으로 갔다. 선착장 바로 앞에는 빨간 지붕의 등대와 4층 높이의 관제탑과 그 부속건물 그리고 대합실로 쓰일 것 같은 레스토랑이 전부다. 레스토랑 Tehueche Sur에 들어섰다. 사람들의 눈길이 내게 꽂히는 것이 느껴진다. 레스토랑은 사람들로 꽉 차 있다. 엉덩이를 비빌만한 구석은 안 보인다.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나올 수밖에. 만약 오늘 바람이 잦아들지 않는다면 가장 가까운 San Gregorio로 되돌아가 숙소를 찾든지 차에서 자야 한다. 얇은 여름 침낭 하나 갖고 차에서 자도 괜찮을지 걱정이 앞선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