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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거니 Jul 11. 2023

추억과 기억 처분하기

 

영화 '헤어질 결심'( https://brunch.co.kr/@jkyoon/502 )의 초반부에 기도수란 사람이 절벽에서 떨어져 죽는다. 주인공 형사 해준이 현장을 감식한다. 배낭, 위스키 술병, 지갑 등에 자신의 이름 이니셜을 새겨 놓은 것을 보고 해준은 '소유욕'이라고 음성 녹음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소유욕 강한 이 남자는 젊은 중국인 아내 서래의 몸에도 자신의 이니셜을 타투했다. 소나 말 엉덩이에 낙인찍듯이… 해준이 병원에서 서래가 가정폭력 당한 증거사진을 살피던 중에 나온다. 이 장면이 매우 충격적이었다. 자식과 아내가 옛날에는 가부장의 소유였다. 노예로 팔 수도 있고, 황야에 내다 버릴 수도 있고, 심지어 죽일 수도 있었다. 옛날도 그리 먼 옛날도 아닌 시절에...


개인적 특성과 독특한 능력, 개인적 소유를 강조하게 된다. 이런 사회는 과시적 소비를 부추긴다. 사람들이 소비재를 자신의 개인적 자질을 나타내는 데 사용하기 때문이다. 심리학자들은 이런 자기 중심화 때문에 사람들이 개인적 소유물을 자기 자신의 연장으로 보며, 소유자의 개인적 정체성과 연결시키면서 물건에 더 큰 가치를 불어넣는다고 주장한 바 있다. 머그컵, 라이터, 비스킷 등은 내 머그컵, 라이터, 비스킷일 때 더 좋아진다.  - 조지프 헨릭의 '위어드' p.494 -


2002년 겨울에 아이들과 함께 미국으로 출발했다. 교환교수로 일 년 정도 머물 계획이었다. 미국생활에서 자동차는 꼭 있어야 한다. 이런 경우 현대차의 소나타나 그랜져(미국명 아제라)를 사서 이삿짐(관세가 면제다.)으로 갖고 귀국하거나, 일 년 뒤 팔고 나올 생각이라면 중고 혼다나 도요타를 사는 것이 가장 가성비 좋은 선택이다. 그렇지만 나는 펜실베이니아의 작은 도시 Altoona의 Dodge 대리점에서 Dodge Intrepid 2003 SE 새 차를 샀다. 귀국하면서 가져갈 마음을 먹고. 난 왜 크기만 컸지 한국에서 A/S 받기도 곤란한 미국차를 사서 심지어 수입관세까지 물면서 갖고 왔을까?


일종의 소유욕이다. 일종의 과시적 소비다. 한국에 정식으로 수입된 적 없는 자동차를 소유한 특별한 사람이 된 것이다. 내 인생이 진부해선 안된다는 강박증을 앓고 있다. 소유하는 것에 돈 쓰지 말고 존재하는 것에 돈을 써야 한다는 신념( https://brunch.co.kr/@jkyoon/84 )을 갖고 살지만, 꼭 소유해야 하는 것이라면 특별한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의 결과다. 내가 어르신이 되듯이 Dodge Intrepid도 만 20년이 넘었다. 자동차는 보통 10년이 넘으면 부품 수급에 문제가 생겨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20년 넘게 유지했다는 것은 특별한 애정(집착일지도 모른다)이거나 특별한 능력이다. 그것도 벤츠나 포르셰가 아닌 미국산 자동차를...


나는 신형 자동차 모델이 나오면 이전 모델과 어느 부분이 달라졌는지 금세 알아차린다. 마주 오던 자동차가 내 시야에서 벗어나면 그 차가 어느 메이커의 어느 모델이고 어느 정도 연식이 지났는지도 안다. 벤츠나 포르셰 신형 모델의 가격이 얼마인지도 안다. 수많은 메이커와 수십 종의 모델들을 브랜드 상표를 보지 않고도 구별해 낸다. 이런 관심과 능력은 사실 중고차 딜러가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소유한 모든 물건이 추억과 기억을 갖고 있다. 추억과 기억 때문에 수명이 다한 물건조차 버리지 못한다. 자신의 소유물을 자신의 연장으로 보고, 자신의 정체성과 연관시켜 더 큰 가치를 물건에 부여하여 차마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유품 중에 필름카메라가 있다. 돌아가시기 직전에 내게 처리하라고 주셨는데 Rollei35와 Leica M3다. 아버지의 고상한(?) 취미 중의 하나가 필름카메라로 촬영하여 직접 현상인화하는 것이었다. 사진작가 수준을 취미로 갖고 싶어 하셨다. 신품인 Rollei35는 가장 작은 카메라로 유명하고, Leica M3 역시 초창기 명품이라 충무로에서 비싼 돈 주고 중고를 구입하셨다. 두 카메라 모두 1970년대 구입하신 것이다. 처음 집에 갖고 오셔서 고등학생인 내게 자랑하시던 광경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두 기종 모두 얼마 전 서거한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이 갖고 있는 모습이 찍혀서 더욱 유명해진 기종이다. 여왕이 즐겨 갖고 다니는 카메라!


필름사진동호회 홈피를 기웃거려 현재의 가치를 가늠했다. 지난달에 Rollei35는 드디어 당근처리 했다. 구매자를 지하철역에서 만나 "아버지가 아주 아끼시던 물건인데 좋은 주인 만난 것 같다"라고 하며 전해줬다. 훨씬 비싼 Leica M3가 아직 남아 있다. 이 여름에 아버지의 추억과 나의 기억도 함께 처분해야겠다.


아버지의 추억이 담긴 물건 하나 처분하는 것도 이렇게 어려운데 내 추억이 담긴 물건들은 언제 다 처분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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