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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거니 Jan 28. 2024

조조강직

내일 해도 될 일을 오늘 미리 할 이유 없다.

은퇴하고 나면, 아침에 일어나 갈 데가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이제 뭘 하지'

이런 생각이 들 때 갈 곳이 항상 있어야 한다. 동굴 같은 곳. 상처를 핥을 수 있는 곳.


대학교수인 나는 지금까지는 학교에 가면 된다. 내 연구실(7평의 동굴 같은 공간)에 가서 데스크 탑 컴퓨터를 켠다. 아무도 내가 그곳에서 무엇을 하는지 간섭하지 않는다. 강의준비를 하든, 연구를 하든, 신문기사를 뒤적이든, 구글맵을 열고 다음 방랑지를 찾든...


은퇴 이후에 사람들이 당황하는 가장 큰 이유는 매일 아침마다 출근하던 곳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알람소리에 깨서 씻고 먹고 옷 입고 정확하게 시간 맞춰 가던 일상이 없어진다는 것이 제일 당황스럽다. 노동을 좋아서 하지는 않지만 습관적으로 하던 것을 하지 못하게 된다. 아침에 왜 잠에서 깨어 일어나야 하는지 모르게 된 것이다. 갈 곳이 없으니 실컷 더 자면 된다. 그렇게 바라던 것 아니었나?


좋아서 하는 일이 있다면 그 일을 하기 위해 아침에 눈을 뜬다. 아침밥 먹고 씻는 것도 그 일을 하기 위해서다. 노동을 좋아서 하는 사람은 없다. 좋아서 하는 일이 호구를 해결해 준다면 그보다 좋을 순 없다. 그렇지만 그런 일을 갖고 있는 사람은 아주 아주 적다. 노동이 아닌 일을 직업으로 갖는다는 것은 축복이다. 전생에 나라를 구했는지도 모른다. 은퇴란 노동이 끝나는 것이다. 사회적 규정에 의해, 결국 타의에 의해서 그만 일하라는 것이다. 젊은 사람에게 노동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나이 들어 더 이상의 노동은 생산성이 떨어지거나 심지어 사고를 발생시킬 수도 있기에 그만하라는 것이다.(항공기 기장도 65세가 정년이다.)


일상의 큰 부분이 없어졌다면 새로운 일상으로 채우면 되는데 쉽지 않다. 새로운 일상을 만들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호구를 해결하기 위해 계속 일을 하고 싶어도 65세 이후에 새로운 직장을 구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 보수적으로 변한다. 진보적이었던 사람도 보수적이 되고, 보수적이었던 사람은 더욱 보수적이 된다. 변화가 싫다. 변화가 아주 불편하다. 변화에 적응 못하거나 안 하거나 결국 나이가 들면 보수적이 된다. 지켜내야 할 기득권이 있고, 변화는 싫다. 변화에 적응하기 힘들다. 육체적으로도 힘들지만 사실은 심리적으로 더 힘들다.


습관으로 채워진 일상을 살다가 은퇴하면 갑자기 일상의 큰 부분이 없어진다. 그러니 막막한 것이다. 어찌할 줄 모르는 것이다. 이렇게 많은 자유시간을 가져본 적이 없다. 너무 많은 자유시간이 부담스럽다. 어찌 채워야 하나...


은퇴 전에는 알람으로 기상했지만 은퇴 후에는 알람 없이 잘만큼 잘 수 있다. 그렇지만 눈뜨고 가고 싶은 곳이 있거나 또는 하고 싶은 일이 있거나 해야 따뜻한 침상을 박차고 일어날 수 있다. 그런 곳이 없거나 그런 일이 없다면 고민스러운 것이다. 일어나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존재이유를 못 찾는다.


습관적으로 살다가 습관이 없어진 것이다. 습관적으로 살아야 정신적 에너지 소모가 없다. 무엇을 할 것인가를 매일 생각해야 한다면, 무엇을 먹을 것인가를 매 끼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힘든 일이다. 생각하고 결정하는 것은 에너지가 많이 든다. 그래서 습관적으로 살아야 생각할 이유가 없고, 에너지가 들지 않아 편한 것이다.




'조조강직'이란 용어가 있다. 아주 최근에 알았다. '조조할인'은 옛날부터 참 좋아했는데, 조조강직이라니…

아침마다 몸이 무겁게 느껴졌다. 침대에서 일어나 첫 발을 떼기가 두려운 것은 ‘족저근막염’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화장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겁다. 어깨도 완전히 펴기 힘들어 구부정하고, 발바닥뿐 아니라 양쪽 무릎도 온전하지 않다.


'조조강직'은 아침에 자고 일어났을 때 혹은 오랜 시간 한 자세로 있었을 때 관절이 뻣뻣해져 움직이기 힘들다가 어느 정도 활동을 하고 난 후에 활동하기 좋아지는 현상을 의미한다. 조조강직은 류마티스 관절염과 퇴행성 관절염의 특징적 증상으로 1시간 이상 지속할 때는 류마티스 관절염을, 30분 이내로 비교적 짧은 시간 지속할 때는 퇴행성 관절염을 의심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건강용어사전)


조조강직을 느낀다는 것은 퇴행성관절염이 시작된 것이다. 65세면 온갖 퇴행성 질환이 시작되고도 한참 진행할 나이다. 알고 있지만 인정하기 싫은 것이다. 65세면 언제 어떻게 되어도 크게 이상하지 않을 나이다. '좀 일찍 가셨네.'하고 안타까워할 사람도 있겠지만, 평균 기대수명 이상을 사는 사람들이 많으니 그들과 평균을 맞춰야 하는 것이다.


은퇴하면 여행이나 다니며 노후를 즐겨야겠단 마음은 헛것이다. 은퇴하면 여행 가기 귀찮다. 여행만큼 정신적 에너지를 많이 쏟아야 하는 것 없다. 여행을 떠나려면 목적을 정하고 함께 할 사람을 구하고 비행기표 사고 여행루트 짜고 숙박예약하고 환전도 하고 유심도 구하고 짐도 싸야 한다. 이 모든 것이 많은 정신적 에너지를 요구한다. 사용 않던 에너지를 쓰려니 머리가 아프다.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이 특히 에너지 소모가 많다. 그리고 환상의 동반자를 구하려면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다. 힘든 노동만큼 필요하다. 육체적 에너지나 정신적 에너지나 결국은 같은 에너지라는 것이 열역학 1법칙(에너지 보존 법칙)이다.


그리고 '조조강직'을 느끼는 나이에 어디를 간단 말인가?

 



다행히 난 아침마다 갈 곳이 있다. 배드민턴 치러 간다. 2년 전에 시작한 배드민턴이 재미있다. 아침 먹고 바로 체육관으로 직행한다. 환복하고 준비운동을 십여분 이상해야 몸이 부드러워진다. 젊은 배드민턴 선수들처럼 용수철같이 뛸 수는 없지만, 배드민턴 스텝을 밟다 보면 몸이 가벼워진 것을 느낀다. 기상한 지 한 시간 반이 지났다. 거의 매일 아침마다 보는 동호회 회원들과 복식게임을 대여섯 번 하고 나서 뜨거운 샤워와 면도를 한다. 오전을 운동으로 채우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배드민턴이 너무 재미있어 아침마다 눈뜨는 것이 즐겁다. 언젠가는 무릎관절이 더 이상 못 버텨 배드민턴을 그만두게 되겠지만 그때까지는 아침에 눈뜨는 것이 신날 것이다. 더 이상 배드민턴을 못 치게 되면 그때 일상을 무엇으로 채울지는 그때 생각하면 된다. 미리 걱정하고 있어 봐야 뾰족한 답도 없다. 답도 없는 고민을 하는 것도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다. 그런 말 있다.


'내일 해도 될 일을 오늘 미리 할 이유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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