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재거니 Feb 21. 2024

사회적 죽음을 위한 장례식


오늘(24.2.20)이 내 정년퇴임식이 열리는 날이다.


매 학기가 시작되기 일주일이나 열흘 전에 대학교에서는 학사협의회란 것이 열린다. 학교 법인의 이사장과 총장이 참석하여 신학기를 준비하는 전체교수를 상대로 진행하는 행사다. 교무행정을 비롯한 학사행정을 처장들이 보고하고, 새로 임용된 신임교수를 소개하고, 정년퇴임 교수들을 위한 정년퇴임식도 열린다. 오늘이 그날이다.


나는 학사협의회 자체를 불참하였다.


정년퇴임하는 것이 우울하거나 섭섭해서 불참한 것이 아니고, 그런 행사에 주인공으로 참석하는 것이 불편할 뿐이다. 아마도 마이크 잡고 정년퇴임하는 소회를 얘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무사히 정년퇴임한다는 것이 기쁘고, 이 학교에서 28년이나 봉직한 것이 자랑스럽다는 판에 박은 인사를 해야 한다. 그런 뻔한 인사말을 내 입으로 한다는 것이 매우 불편하다.


정년퇴임식은 사회적 죽음에 대한 장례식이다. 그것도 합동장례식이다. 이번 학기 정년퇴임하는 교수가 6명이니까. 그런 합동 장례식에 주인공으로 참석하여 꽃다발을 받고, 이사장과 총장뿐 아니라 많은 동료 교수님들로부터 축하를 받을 것을 생각하니 정신이 아득하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참석하지 않겠다고 굳게 마음먹고 있었다.( https://brunch.co.kr/@jkyoon/226 )


교무처로부터 학사협의회 참석여부를 묻는 단체문자를 며칠 전에 받았다. 구글 링크를 통하여 참석여부를 입력하란다. 불참을 입력했더니 교수지원팀장이 직접 전화를 해서 확인한다. 꼭 참석해 달라고 강권하지 않는다. 불참 이유를 묻지도 않는다. 참 다행이다. 아마도 꽃다발을 준비하기 위함일 것이다.


정년 퇴임은 축하받을 만한 일이다. 사고 치지 않고 건강하게 만 65세를 맞아 정년퇴임을 하는 것이 모든 교수에게 당연한 것은 아니다. 정년퇴임 전에 사망하는 교수님들도 내 주변에 심심치 않게 있다. 학과 교수님들이 마련한 정년퇴임 특별강연에서 치매(?)로 인하여 감사인사를 제대로 끝맺지 못한 교수님 얘기를 들은 적 있다. 결국 퇴임 후 7년 이상 아프시다 최근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생명보험 회사의 내부 데이터라고 한다. 정년퇴임 후 5년 이내에 사망하는 교수님들이 제법 많다고 한다. 아마도 퇴임 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그렇게 평균수명조차 채우지 못하고 돌아가시는 것 아닌가 싶다. 그러나 퇴임 후 5년을 넘긴 교수님들은 제법 오래 산다고 한다. 평균수명을 훌쩍 넘긴다고 한다. 즉 퇴임 후 5년이란 기간이 매우 위험한 기간이란 얘기다. 믿거나 말거나...


솔직히 정년퇴임한다는 것이 난 너무 좋다. 이제는 노동하지 않아도 된다. 교육과 연구도 호구를 위한 일종의 노동이다. 다른 노동과 다른 점이 있다면 교육은 수강생이 매년 바뀐다는 것이다. 매년 새로운 학생을 가르친다는 것이 덜 지겹다. 심지어 새로운 경험이기도 하다. 연구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 된다. 똑같은 연구를 하는 것이 아니다. 남들과 다른 연구를 할 수 있고, 매년 다른 연구를 할 수 있다. 그래서 노동이지만 덜 지루하다. 노동하지 않고 사는 사람을 나는 귀족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나는 귀족이 되는 것이다. 정말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사는 것이다. 그래서 너무 좋다.


정년퇴임식을 비롯한 학사협의회가 열리는 오후 시간 나는 집에서 빈둥거렸다. 오전 시간 배드민턴을 세게 쳤기에 점심 식사 후 나른한 몸을 소파에 묻고 잠들었다. 비몽사몽간에 1976년 고등학교 3학년 시절이 기억났다. 11월 중순 예비고사를 치르고 대학별 본고사를 보던 때였다. 예비고사 이후에 고등학교는 개점휴업이었다. 예비고사 이전에 진도를 다 끝냈으니 수업은 없다. 그러나 교실에 모든 학생을 잡아두고 각자 공부하란다. 본고사는 대학별로 다르니 학교에서는 해줄 것이 없다. 친구와 둘이 학교 담장을 넘어 소위 땡땡이(?)를 쳤던 기억이 났다. 교사들의 폭력이 난무하던 학교를 벗어나 자유를 느낀 것이 아니고, 뒤통수가 당기는 찜찜한 기분을 느끼며 학교 언덕길을 달려 내려오던 기억이...


내 장례식을 땡땡이(?) 쳤다.




지난 토요일 오후에 학교에서 작은 행사가 있었다.


한 달 전에 학과 동아리(지난 20년간 지도교수였다) 회장을 했던 졸업생이 내 일정을 물었다. 자작자동차 소모임 총동문회 행사를 하려 하는데 언제 내 시간이 가능하냐고 묻는다. 지난 연말에 졸업생들하고는 송년회를 하며 이미 인사( https://brunch.co.kr/@jkyoon/627 )했는데 뭘 또 하려나 하면서 가능한 날짜를 두세 개 주었다. 며칠 전에 보내온 행사일정을 보니 동아리 연혁소개 및 올해 사업계획서 설명뿐 아니라 동아리 지도교수 이취임식이 포함되어 있었다. 동아리 지도교수 이취임식이라니... 작년 대학생 자작자동차 경진대회부터 후배교수님에게 지도교수를 이미 떠넘겼는데...


행사 당일 아침부터 생각이 많았다. 정장을 입고 가야 하나? 넥타이를 매야할까? 마이크 잡고 한마디 해야 할지도 모르는데 무슨 말을 하지? 그냥 평상복으로 갈까? 아예 파워포인트를 준비할까? 내 브런치스토리를 소개하고 말까?


토요일 오후 학교 큰 강의실을 빌리고 동아리 회장을 했던 졸업생 두 명과 재학생 회장이 모든 것을 준비했다. 지난 20여 년의 역사를 사진과 동영상으로 프레젠테이션 하고, 재학생 회장의 올해 사업계획과 작년 대회의 문제점 분석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지도교수 이취임식이다.


"지도교수였지만 저는 지도한 적 없습니다. 성인인 대학생 여러분들이 협심하여 자동차를 만들고, 경진대회에 참가하여 신나게 달릴 수 있도록 온갖 지원만 했습니다. 더운 여름에 땀 흘리며 함께 한 시간이 여러분의 평생의 추억으로 남고, 그 추억의 한 구석에 제가 서 있었다는 것을 기억 못 해도 그만입니다. 그렇게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자리 만들고 꽃다발까지 주니 고맙습니다."


나 때문에 동아리 지도교수를 떠맡게 된 후배교수님의 취임사에 기억나는 말이 있었다. 자신도 대학생 시절 동아리 활동 참 열심히 했고, 그래서 동아리 회장도 했지만 한 번도 지도교수를 뵌 적 없었다고. 그래서 그런 지도교수인 줄 알고 맡았는데, 작년 해보니 이 동아리는 아닌 것 같다고...


졸업생들과 재학생들 모두와 저녁식사를 했다. 식사대금이 걱정되어 행사를 주관한 졸업생에게 물었다. 회비를 걷었냐고? 재학생은 무료고 졸업생들이 N빵 하기로 했으니 걱정 놓으란다.


이런 회식 자리에서 교수는 먼저 자리를 뜨는 것이 예의다. 오랜만에 만난 졸업생들은 서로 할 얘기도 많고 풋풋한 재학생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도 많다. 후임 지도교수와 먼저 자리를 뜨면서 내가 마지막 건배 제의를 했다. 

"우리가!"

"남이가!!!"

진부한 건배사지만 20여 년의 전통을 가진 동아리 선후배들이 함께 할 수 있는 건배사라 생각하며...

후임 지도교수와 헤어지며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리고 "앞으로 20년 부탁한다고..."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나이 들면 애가 된다던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