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서귀포( https://brunch.co.kr/@jkyoon/412 ) 동굴에서 10박을 보냈다. 제주도는 나의 방랑지가 아니다. 어엿한 내 주거공간이 있으니...
35살의 아들은 내 동굴( https://brunch.co.kr/@jkyoon/324 )과 붙어있는 동굴에서 재택근무 중이고, 목금토에는 심지어 2박 3일 육지로 출장을 갔다 왔다. 난 2박 3일 동안 묵언수행했다. 함께 있는 동안은 점심과 저녁을 겸상했다. 저녁에는 술도 마시며 미래에 대한 얘기도 하고, 현재의 어려움에 대한 얘기도 하고, 지난 시절의 공유한 추억 얘기도 했다.
서귀포 역시 매일 폭염이었다. 낮에는 35도를 오르내리고, 밤에도 27도 이상의 열대야다. 집 밖으로 거의 나가지 않았다. 오피스텔 9층 펜트하우스에서 멀리 바다를 가끔 바라볼 뿐, 책 보거나 노트북으로 유튜브 보다가 이른 저녁을 먹고 가까운 서귀포 고등학교 천지체육관을 찾았다.
2023년 10월에 두 번 방문했고, 이번에는 연속으로 월화수목금 무려 다섯 번 방문했다.
천지클럽은 제주도 서귀포시에 있는 25개의 배드민턴 클럽 중의 하나다. 서귀포고등학고 체육관에서 일요일을 제외하고,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배드민턴을 치는 동호회다. 작년의 기억이 떠오른다. 서귀포배드민턴협회 홈페이지에서 천지클럽의 총무님 전화번호를 찾아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서귀포 아들집을 방문했는데 게스트로 배드민턴 칠 수 있냐고?
이미 잘 운영되는 대부분의 동호회가 배타적이다. 아니 동호회가 배타적이 아니고 사람이 배타적이다. 동호회는 회원으로 구성되는 하나의 작은 사회고, 회원들은 호모사피엔스다. 호모사피엔스는 일단 외부인에 대해 의심하고 경계한다. 수만 년 동안 생존하면서 외부인을 경계하고 의심했던 조심스러운 호모사피엔스들이 살아남았다. 집단을 이루어 살던 호모사피엔스들에게 집단의 경계를 넘어온 외부인은 침략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총을 든 스페인의 군인(?)들을 태양신이 보낸 사신으로 착각했던 잉카제국이나 마야문명 사람들은 몰살당했다.
게스트가 제법 빈번한 서울의 혜화클럽(오전 10시부터 12시)은 게스트에 대한 규정이 있다. 게스트에게 7,000원을 받는다. 셔틀콕 비용이라고 봐야 한다. 게스트로서 동호회 참석은 한 달에 다섯 번까지다. 그 이상은 회원으로 등록해야 한다. 서귀포 천지클럽은 게스트에 대한 규정이 아예 없다. 게스트가 거의 없거나, 있어도 동호회원이 함께한 경우라 딱히 규정을 둘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수 있다. 체육관 등록비는 없고 회비는 한 달에 4만 원이란다. 거의 셔틀콕 비용이다.
저녁 8시 5분 전에 체육관 철문을 열었다. 제법 많은 사람들이 이미 배드민턴을 치고 있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배드민턴 가방을 들고 코트 사이를 걸어간다. 아주 애매모호한 생황이다. 아는 회원도 없는데 누구에게 내 상황을 얘기하고, 어울려 배드민턴을 치고 싶은 내 마음을 전할 것인가?
체육관 중앙 본부석(?)에 앉아 있던 젊은(40대이거나 50대 초반) 남자가 어디서 오셨냐고 내게 묻는다. 호의적인 질문이 아니다. (넌 누군데 우리 클럽에 갑자기 나타난 거냐?) 난감하다. 집에서 왔지요는 아닌 것 같고, '서울에서 왔지요.' 했다. 서귀포 아들집에 왔다가 배드민턴 치고 싶어서 왔지요. 옆 벤치에 앉아 있는 조금 더 나이 들어 보이는 남자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게스트 인가 봐요.' 한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나이 든 분이 천지 클럽 회장님이었다. '오늘 월요일이라 코트가 좀 붐비지만 함께 좀 쳐보죠.' 한다.(코트가 붐벼 게스트 별로 환영 안 하지만 이왕 오셨으니 할 수 없죠. 가시라고는 못하겠네)
이런 불편한 상황을 타개코자 편의점에서 사 온 이온음료 네 병을 본부석 테이블에 올려놨다.(셔틀콕 값으로 생각하세요.) 작년에 방문했을 때는 코트가 한산했다. 젊은 사람들은 거의 없었고 나이 좀 있는 분들만 좀 있었는데, 그 사이에 이삼십 대 젊은 남녀 회원들이 많이 늘었다. 제주도민이 늘지는 않았으니 젊은 사람들이 배드민턴을 치기 시작했다고 봐야 한다. 작년에도 이런 애매모호한 상황에서 나와 난타를 쳐주고 복식 게임도 만들어 끼워주셨던 어르신이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오늘 그분이 안 보인다.
본능적으로 인간은 애매모호한 상황을 싫어한다. 정신적 에너지가 많이 들기 때문이다. 가능한 에너지 소모를 줄여야 생존에 유리하기에 습관적으로 편한 것만을 찾는 것이 당연하다. 특히 나이가 들면 더욱 습관적으로만 행동하고 싶어 진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도 반갑지 않고, 새로운 일을 시도하기는 귀찮다. 사실 나도 그렇다. 그렇지만 의식적으로 애매모호한 상황을 접하려 한다. 새로운 경험이란 대부분 아주 애매모호한 상황이다. 당연히 리스크도 존재한다. 새로운 경험이 아주 신난 경우가 젊을 때는 많았지만 이제는 아주 가끔 있다. 그리고 새로운 경험이 별 볼 일 없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 나이다. (10월이면 만 66)
낮에 본 유튜버가 생각난다. 단독으로 배낭 메고 세계여행 하면서 여행 콘텐츠를 끊임없이 만들어 내고 있다. 오늘 엘살바도르의 화산 트레킹을 다녀오고 나서 여행에 회의가 들었단다. 화산 정상의 칼데라호를 보는데 아무런 감동이나 감흥이 느껴지지 않더란다. 에티오피아의 화산을 본 경험이 오버랩되면서 그거나 이거나... 갑자기 여행의 의미를 잃어버렸단다. 그래서 이제 여행을 접고, 따라서 유튜브 채널도 접고 내일 한국으로 돌아간단다.(집 떠난 지 800일이면 정말 오래되었다. 향수병이 오고도 지날 기간이다. 유튜버란 항상 새롭고 신기한 콘텐츠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다. 그런 압박감이 지루하게만 느껴질 뿐 더 이상 자극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엘살바도르가 치안이 아주 안 좋은 나라다. 치안이 불안하다는 것이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강도나 소매치기를 만날까 봐 항상 조심해야 한다. 스트레스에 지친 것이다.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는 거지 하는 회의감이 든 것이다.)
천지클럽 회원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마음두지 말자. 남의 눈을 의식할 필요 없는 나이다. 매일 이온음료 네 병을 사들고 아주 뻔뻔(?)하게 월화수목금 5일을 천지클럽을 갔다. 앉아서 쉬고 있는 회원에게 난타를 부탁한다. 거절하는 회원은 없었다. 거절하지 못할 사람을 찾아내는 신통한 능력이 내게 있는지도 모른다.
매일 이온음료를 들고 저녁 8시에 나타나는 이방인에 천지클럽 회원들이 익숙해져 간다. 서귀포에 있는 연유를 묻는다. 오래 있을 거면 회원등록 하라는 사람도 있다. 드디어 인사를 받아주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이를 묻는 사람도 있고, 아들은 무슨 일 하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내 나이 또래로 보이는 어르신이 슬리퍼를 신고 코트 주변을 어슬렁(?)거린다. 회원들을 다 아는지 누구와도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니 오랜 회원이었음이 확실하다. 작년에도 뵌 기억이 나서 '왜 배드민턴 안치세요?'하고 물었다. 어깨가 아파서 쉬고 있단다. 작년에도 치는 것을 보지 못했던 것 같은데... 아마도 그렇게 오랫동안 중독되었던 배드민턴을 매정하게 포기 못하고 체육관 주변을 맴돌고 있다. 이방인인 나를 챙겨준다. 3명이 모여있는 동호회원들에게 나를 끼워 복식 게임하라고 심지어 명령(?)한다.
5일을 매일 저녁 배드민턴을 치고 동굴에 와서 환상적인 샤워를 한다.
맥주 한 캔을 단숨에 들이켜고 매일 꿀잠을 잔다.
이거 괜찮은데...
서울 가면 저녁 배드민턴 클럽을 찾아서 등록할까?
어떤 날은 오전 클럽, 어떤 날은 저녁 클럽, 어떤 날은 오전과 저녁!
상상하기는 괜찮다만 어르신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