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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Lee Feb 18. 2022

어학연수생 J는 어쩌다 영주권자가 되었나?

캐나다 이민의 서막



캐나다에서 10개월만 ‘잠깐’ 어학연수하고 돌아오겠다던 나는 어쩌다 이렇게 아예 눌러앉게 되었나?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다음과 같이 4단계의 마음의 변화를 거치며 내 계획이 서서히 바뀌게 된 것 같다.



1단계: 조금 더 있을 수 있다면…

영어를 더 잘하고 싶어


어학연수 오기 전 내 야심 찬 계획은 분명 이랬다.

어학연수 10개월 -> 영어회화 실력 바짝 끌어올리기 (스펙 쌓기) -> 한국에 돌아가 (더 좋은 데로) 재취업


그런데 바로 이 계획에 큰 오류가 있다는 걸 어학연수 3개월 만에 깨달았다. 10개월 갖고 영어회화 마스터? 택도 없는 소리라는 것을.


예전에는 한 1년쯤 어디 외국에 나갔다 오면, 그게 어학연수든 유학이든 교환학생이든 영어는 “마스터”해서 오는 줄 알았다. 실제로 대학생 시절, 교환학생으로 미국에 1년씩 나갔다 온 친구가 몇몇 있었는데, 그 친구들이 복학하면 늘 처음으로 날리는 단골 멘트가 있었다.


"올~ 이제 영어는 네이티브처럼 하겠네?"


그러면 그 친구들은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며 얘기했는데, 나는 그 대답을 겸손함이라고 받아들였었다.


그런데 내가 해 보니 알겠더라. 1년 갖고 네이티브? 택도 없다. 그러니 조금씩 초조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큰맘 먹고 나왔으니 뭐라도 해 놓고 돌아가야 하는데, 10개월로는 내 목표 달성에 한참 부족한 것 같아 조금 더 머물고 싶었다.


근데 돈도 없고 나이는 들어가고, 현실적으로 힘들겠지?



2단계: 조금 더 있을 수 있겠는데?

알바를 구하다


내가 처음 어학연수 계획을 10개월로 짠 데는 내 예산이 2천만 원밖에 없다는 제약이 가장 큰 이유였는데, 알바를 해서 돈이 벌리기 시작하니 10개월 이상 있을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이 생겼다.


당시 이곳 시급은 (캐나다 달러로) 8불. 환율을 대충 따지면 대략 8천 원쯤 되는 돈이었는데, 하루에 8시간씩 일주일에 5일만 일해도 한 달에 1,300불 정도의 수입이 생겼고, 팁까지 합치면 매달 1,500불 이상의 수입이 있었다. (참고로, 내가 일했던 레스토랑은 팁을 전 직원과 함께 나눴기 때문에 액수가 많이 나오는 편은 아니었는데, 그래도 하루 평균 10불 이상씩은 현금으로 받았다.)


캐나다의 팁 문화:
캐나다에는 레스토랑, 미용실, 택시, 수선집 등 단순 물품 구매가 아닌, '서비스'를 받는 곳에서는 팁을 주는 문화가 있다. 10여 년 전만 해도 보통 총금액의 10% 이상을 주는 게 관례였는데, 지금은 물가가 오르면서 팁% 도 같이 올라, 15% 이상을 기대하는 곳도 많아졌다.


학원은 첫 6개월만 풀타임으로 다니고, 그 뒤로는 알바를 풀타임으로 하다 보니, 생활비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던 학원비가 빠지면서 아르바이트비만으로도 한 달 생활이 가능해졌다.


경제적인 문제가 해결되고 나니, 더 있고 싶다던 희망(wish)이, 더 있을 수 있겠다는 소망(hope)으로 바뀌었다.


어라, 10개월 이상 더 있을 수 있겠는데?



3단계: 이런 곳에서 살고 싶어

도시와 사람에 반하다


빅토리아는 정말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었다. (서울에 비해) 여름에는 덜 덥고, 겨울에는 덜 추웠고, 모든

경치가 예뻤지만 야경은 특히 너무 아름다워 볼 때마다 눈물이 맺힐 지경이었다.


캐나다의 날씨: 캐나다는 무조건 ‘추운 곳’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은데 다 그런 건 아니다. 겨울 기온이 영하 3,40도 이하로 내려가는 곳도 많지만, 비씨주의 밴쿠버와 빅토리아는 날씨가 온화한 편이다.


이너하버와 엠프레스 호텔
빅토리아의 국회의사당 - 야경이 특히 멋지다


그렇지만 내가 이곳에서 제일 좋아했던 것은 온화한 기후도, 예쁜 경치도 아닌, 사람이었다.

친절하고 여유 있는 사람들.


길가다 눈 마주치면 살짝 미소 지으며 “Hello” 인사하는 사람들

어딘가 들어가고 나올 때 다음 사람을 위해 문을 잡고 기다려주는 사람들

버스에서 내릴 때 버스 기사님께 “Thank you!”라고 인사하며 내리는 사람들


나는 그들이 좋았고, 그렇게 살 수 있는 그들이 부러웠다.


서울에서 나는 늘 바빴다. 

시간과 잠은 늘 부족했고, 그러다 보니 예민했고, 뒷사람을 위해 문을 잡아주는 그 3초의 여유는 사치일 때가 많았다. 학교에 늦을까 봐, 회사에 늦을까 봐, 약속에 늦을까 봐, 늘 뛰어다녔고, 지하철이 들어오는 효과음이라도 들리면, (약속에 늦지 않았을 때도) 그걸 타겠다고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그냥 조금 천천히 가서 다음 열차를 타도 되는 걸.


나는 왜 늘 바빴을까? 나도 여기 사람들처럼 이렇게 여유 있게 살고 싶어…


당시 한국에 있는 전남친한테 그 얘기를 했더니, 그는 내가 현실감각을 잊었다고, 세상이 (한국이) 얼마나 치열한지 돌아오면 새삼 깨닫게 될 거라고 얘기했다. 그런데 그의 그 말이 잊었던 내 현실감각을 돌려놓는 대신, 왜 나는 이렇게 여유 있게 살면 안 되는지, 오히려 더 악착같이 나도 이 사람들 속에 속하고 싶었다.


엄마, 나 비자 연장하려고.
한 1년만 더 있다 갈게.



4단계: 나 왠지 여기서 살게 될 것 같아

사랑에 빠지다


그를 처음 만난 건 레스토랑에서 서빙 알바를 하던 시절이었다. 나는 풀타임으로 근무를 하고 있었고, 이 친구는 원래 다른 일이 있는데 그 회사의 일감이 줄면서 주 4일만 일하게 되자, 세컨드 잡으로 일해볼까 하고 내가 일하고 있던 레스토랑에 지원을 했던 것이다. 당시 사장님, 스시 셰프, 주방 이모님, 서버 모두 한국인이었는데, 처음으로 한국인이 아닌 직원이 들어오게 되었다.


당시 나는 한국에서 꽤 오래 만났던 전 남친과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라 누군갈 또 만나고 연애하고 싶다는 생각이 전혀 없는 상태였고, 우린 그렇게 그냥 잘 맞는 동료가 되었다.


 친구는  친절했다. 나한테만 그랬던  아니고, 다른 직원, 특히 주방 이모님들한테 살갑게 대했다. 어느 날은 날이 춥다며 인스턴트 핫초코를   챙겨 와서는 하나하나 타서 모두에게 건네주었다. 나는 그런 A 좋았다. 동료로서.


그런데 같이 일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종종 사적인 얘기도 하다 보니, 우리는 동료 이상 친구가 되었고, 자연스러운 수순인 듯 연인이 되었다. 그렇게 나의 계획은 아무도 모르게 서서히 바뀌고 있었다.


있잖아… 나 왠지 여기서 살게 될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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