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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Lee Apr 21. 2023

캐나다에서 안과를 다닙니다

안경도 안 쓰는 제가요.


때는 2014년,

막 대학원에 입학해 고군분투하던 시기였다.


나는 시력이 좋은 편이라 안경도 쓰지 않고 안과와도 거리가 아주 먼 사람이었다. 그런데 남편 회사에서 매년 시력 검사 및 간단한 눈 검사를 무료로 해주는 덕에 그해에도 남편과 함께 검안 클리닉을 찾았다.


검안의가 내 눈을 이리저리 살펴 보더니, 안과의사를 만나볼 것을 추천했다. 그냥 '혹시 모르니까'라는 말만 할 뿐 정확한 이유는 알지도 못한 채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그가 추천해 준 안과의사를 만나러 갔다.


캐나다의 안과 시스템

안경사 (Optician)
검안의 (Optometrist)
안과의사 (Ophthalmologist)

안경사는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안경점에서 간단한 시력검사 정도를 하는 사람.

검안의는 시력검사, 기능검사 등 대부분의 눈 검사와 간단한 치료는 할 수 있지만, 수술이나 시력교정술 (라식/라섹) 같은 외과적 치료는 안과의사만 할 수 있다.


검안 클리닉과 안과가 구분되어 있는 캐나다 의료 시스템 특성상, 안과의를 찾는 사람은 실제로 어떤 치료나 수술이 필요한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특히 내가 만난 닥터는 백내장 전문이라 대기실에는 연세가 꽤 있으신 할머니, 할아버지 환자뿐이었다. 딱 봐도 손녀뻘밖에 안되는 내가 끼어 있을 자리가 아닌 것 같았다.


조금 기다리자 내 이름이 호명되었고 또 여러 검사를 진행했다. 마지막 검사를 마치고 나니 나를 내내 도와주던 검안의가 물었다, 내가 여기 왜 왔는 줄 아냐고. 그에 나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Glaucoma가 의심돼서 오신 거예요.


내 표정에 별 변화가 없자 그분은 내가 글라코마가 뭔지 모른다는 걸 눈치채고 그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Glaucoma는, 시신경의 문제로 시야 결손이 발생하는 질환으로.... 어쩌고저쩌고... 시력이 점점 감소하다가 결국 시력을 잃을 수도 있는 병입니다."


가볍게 듣고 있다가 마지막 문장에서 그대로 멈췄다.


시력을 잃을 수도 있다고??


아직 결과가 나온 건 아니니 너무 미리부터 걱정하지는 말라는 위로 아닌 위로를 들으며 병원을 나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버스에 타자마자 "glaucoma"를 검색해 봤다.


"녹내장"


Glaucoma는 우리말로 녹내장이었다. 하지만 그게 녹내장인걸 처음부터 알았다고 해도 나는 그 병이 어떤 병인지는 몰랐을 것이다.


녹내장이란?
실명을 일으키는 3대 질환 중 하나로 시신경의 문제로 시야결손이 생기고 심하면 실명에까지 이르는 병.

대개 높은 안압이 원인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고 (녹내장 환자의 70%가 정상 안압), 한번 손상된 신경은 회복이 되지 않기 때문에 녹내장 진단 시 진행 속도를 최대한 늦추는 관리가 필요하다.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aver?volumeNo=33843726&memberNo=3600238


좀 더 도전적으로 살아보겠다고 하던 일을 그만두고 대학원까지 시작한 때였다. 외벌이를 자처하고 내가 공부하는 걸 적극적으로 지원해 준 남편 덕에 누리고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그런데 내가 녹내장일 수도 있다니? 시력을 잃을 수도 있다니??


집에 오는 내내 남편 생각이 났다. 너무너무 미안했다. 그런 일은 없으면 좋겠지만, 진짜 혹시라도 내가 시력을 잃게 된다면 그런 내 곁에서 제일 힘들 사람은 나의 동반자이자 보호자가 될 남편이기 때문이었다.


저녁에 퇴근해 온 남편을 보자마자 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하며 아이같이 펑펑 울었다. 남편도 속으로는 적잖이 놀랐을 텐데도 그런 내색을 전혀 하지 않고 "괜찮아, 내가 있잖아"라며 그저 나를 꼭 안아줬다.


녹내장이 아닐 수도 있지 않냐, 치료하면 괜찮을 거다, 같은 조금 더 현실적인 말보다 그저 "내가 항상 네 곁에 있겠다"는 그 말이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그 따뜻한 한마디가 얼마나 고마웠는지.


그리고 그다음 주 다시 병원을 찾았을 때, 나는 "현재는 녹내장이 아니지만, 그럴 위험요소가 있으니 앞으로도 계속 추적 검사를 해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 후로 9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녹내장 위험요소가 있는 환자'로 계속 의사를 만나고 있다.


내가 다니는 안과 병원. 여기는 의사가 있는 방으로 환자가 들어가는 게 아니라, 환자가 먼저 들어가서 기다리면 의사가 이 방, 저 방 옮겨 다니며 진료 및 검사를 한다.


9년 전 처음 안과를 방문했을 때에도, 그리고 시간이 꽤 흐른 지금도 여전히 대기실 막내는 나다. 하지만 이제는 병원 가는 길이 무섭지 않다.


작년말 병원에 갔을 땐 내 담당의 휴가로 다른 닥터를 만났는데, 그와는 한국 드라마 얘기만 실컷 하다 왔다. 당시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넷플릭스에서 인기였는데, 나도 아직 보지 못한 그 드라마를 머리가 희끗한 백인 닥터가 정말 재밌게 봤다며 나한테 추천해주기도 했다.


드라마 추천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런 대화를 한다는 건 그만큼 내 상태가 걱정할 일이 아니라는 뜻이었고, 그래서 또 한번 마음을 놓았다.



남편은 알까? 그때 "무슨일이 생기더라도 늘 네곁에 있겠다"는 그의 한마디에 내가 얼마나 안심이 됐었는지.


그후 대학원을 마치고 CPA 공부까지 연달아 하면서 '내 시력이 예전같지 않다'고 느낄 때에도, 검안 클리닉에서 "이제는 운전할 때라도 안경 쓰시는 게 좋겠어요"라는 말을 들었을 때에도, 여전히 내 마음속에 두려움이 없었던건, 어떤 상황에서도 그가 평생 나를 지켜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신과 나,

할머니, 할아버지 되어서도 서로를 아끼고 의지할 수 있는 그런 예쁜 커플이 될 수 있기를...❤ 




사진 출처: unsplash.com



*이 글은 <헤드라잇>에도 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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