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꿈을 응원해주는 한 사람
당시 나는 캐나다에서의 첫 오피스 잡이었던 어학원을 떠나, 조금 더 큰 다른 어학원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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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코디네이터로서의 업무는 대체로 즐거웠다. 학생들의 얘기를 듣고 공감해 주고 조언해주는 모든 시간이 좋았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캐나다에 정착을 하고 나니, '캐나다가 내 인생에 단지 잠시 스쳐 지나가는 곳이 아닌, 앞으로 제2의 Home Country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자 장기적인 측면에서 커리어를 고민하게 되었다.
자연스레 스펙을 좀 더 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번째로 든 생각이 현지에서 뭐가 됐든 수료증이라도 하나 따 놓아야겠다는 생각이었다. 한국에서 이미 대학을 졸업했지만, 내 학사 학위는 이력서에 추가된 한 줄 이상의 의미가 없었다.
한국 명문대 출신이라면 대우가 다를까?
안타깝게도 현지에서 기대만큼의 가치를 인정받기는 어렵다. 굳이 비교하자면 한국의 명문대에서 딴 학위보다 로컬에 있는 (유명하지 않은) 대학에서 딴 학위가 취업에는 오히려 더 유리할 가능성이 높다.
신랑은 내가 조금 더 공부를 해볼까 하는 생각에 굉장히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여러 대안을 두고 고민해 봤는데, 현지 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하는 ‘3개월 단기 인텐시브 비즈니스 과정’이 제일 무난할 것 같았다.
그러던 중 회사에서 마찰이 있었다.
원래 6개월의 수습 기간이 끝나면 보험을 들어준다고 했었는데, 6개월이 한참 지나고 나서도 보험 가입이 차일피일 미뤄졌다. 사실 보험가입이 급하게 필요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회사에서 당연히 해 줘야 할 것을 이리저리 핑계 대며 해주지 않는 것에 화가 났다.
핑계도 다양했다.
신청서 양식이 바뀌어서
본사 승인이 안 떨어져서
보험사가 전화를 받지 않아서
추가 서류가 더 필요해서 등등
몇 달을 계속 이 문제로 다투다 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나도 인내심을 잃어갔다.
나중에는 보험이 꼭 필요하다기보다, 오기로라고 꼭 받아내고야 말겠다는 생각에까지 미치며 스트레스가 점점 커졌고, 결국 회사를 그만 두기로 했다.
대략적인 상황을 알고 계시던 아빠가, 퇴사 결정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메시지를 보내셨다.
바둑을 둘 때 상대가 정수가 아닌 악수, 묘수, 꼼수 등을 둘 때 대응하는 가장 좋은 수는 ‘정수’이다. 같이 악수를 두기 시작하면 판이 엉망이 되어 바둑 둔 두 사람 모두 부끄러운 기보로 남게 된다. 이겼던 졌던 결과에 상관없이...
마지막까지 기분 좋게 잘 마무리하길 바란다.
내 보험가입은 퇴사 시까지 끝끝내 처리가 되지 않았지만, 나는 아빠 말씀대로 좋은 추억만 가지고 기분 좋게 회사를 나왔다.
마지막 업무까지 인수인계를 끝내고 집으로 온 날, 저녁을 먹고 신랑과 나란히 소파에 앉아있는데 갑자기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렀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혼자 공부하겠다고 회사를 그만두면서 신랑한테 경제적인 부담을 주게 된 것 같아 미안함이 들었고 (같이 열심히 벌어서 모기지 대출 갚기로 해놓고...), 배짱 좋게 그만두긴 했는데 막상 일을 벌여놓고 보니 잘한 결정인지 걱정되는 마음이 들었다 (나 솔직히 자신 없어...ㅠㅠ).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신랑한테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러자 A는 그런 내 손을 양손으로 꼭 붙잡고 말했다.
J야, 너랑 나 먹고사는 건 내가 평생 책임질게. 너는 네 꿈을 위해 살아.
헉, 꿈을 위해 살라니... 이 사람 진짜 너무 스윗해ㅠㅠ
그리고 그는 덧붙였다.
"너는 꼭 멋지고 훌륭한 사람이 될 거야. 어떻게 아냐고? 나는 네 눈에서 그게 보여.”
세상 어디라도 이 사람만큼 나를 이렇게 전적으로 믿어주고 응원해주는 사람이 있을까?
내가 당장 가진 무언가에 대한 것이 아닌, 나의 가능성을 나 자신보다도 더 믿어줬던 남편. 그의 확신에 찬 말과 눈빛엔 정말 내가 뭐라도 될 것 같은 희망이 생기는 이상한 힘이 있었다.
그리하여…
한국에서 대학교를 졸업하며 내 인생에 다시 공부할 일은 없겠다고 생각했던 내가, 그로부터 몇 년 후 캐나다에서 다시 학생이 되었다.
그러나 그 3개월 일정의 공부를 시작으로 그 후 5년을 더 공부하게 될 거라곤 그땐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