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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음날 Apr 18. 2023

루틴을 가진다는 것은

좌충우돌 천방지축으로 살아가던 젊은 날에는 몰랐다. 방방 뛸 듯 즐겁고 신나야 인생이 재밌는 줄 알았던 것이다. 심장이 뛰는 일을 하고 싶었다. 19살의 나는 도피성 유학이 아니라 정말 불법취업을 위해 캐나다로 떠났다. 이민국의 레드라인을 걸어가며 당일 대한항공 화물기를 타고 추방당하는 건 아닐까 마음 졸이던 아찔한 심경이 지금도 생생하다. 여차저차 여행이라고 끝끝내 설명한 끝에 6개월짜리 도장을 받을 수 있었지만 한 달을 채우지 못하고 귀국을 결정했다. 


무모하고 또 무모했다. 캐나다에서 한 것이라고는 아침에 테니스를 몇 번 친 것과 둘레가 십여 미터는 족히 넘어 보이는 거대한 나무와 사진을 찍었던 일 그리고 한인 민박집 사장님에게 사기를 당한 정도의 일 밖에는 없다. 1인실에서 2인실이 되고 다인실이 되었다가 결국에는 소파뒤로 밀려나는 과정이 참 빠르기도 했다. 유학생의 등골을 빼먹으며 살던 한인부부의 뻔뻔함은 아직도 아릿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25년이 흐르는 사이 나는 무얼 했단 말인가. 나는 여전히 그냥 당일 눈뜨고 살아지는 대로 살아왔다. 나를 방임한 대가는 컸다. 나사를 조이지 않고 흐드러지게 방치해 둔 삶은 혹독한 교훈을 장전한 채 오도카니 머물러 있었다. '무서운 녀석'이다. 늘 그렇듯 임계점을 돌파하는 건 어느 한순간이며 '점'이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몰아치듯 온다는 사실을 중년을 넘어선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체득하곤 한다. 그것은 99도에서 물이 끓지 않는 것처럼 극에 달하지 않은 상태는 넘칠일이 없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알아챈 것이다. 관리하지 않은 기계는 언젠가 굉음을 내며 박살이 나고 보살핌을 소홀히 여긴 인체는 몸과 마음이 박살이 나고야 만다. 이는 필연이다.


다행이다. 죽기 전에 살아나서.


건강이 박살이 나고 피폐해진 정신으로 가장 먼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찾은 곳은 지역의 유명 한의원이었다. 상담을 받고 약을 짓고 침을 맞았다. 내 또래의 원장선생이 진맥을 하며 '잘 오셨다.'는 말 몇 마디가 위로가 되었다. 하지만 보약은 어느 날부터 두통을 동반했고 침은 효력이 없어졌다. 내가 변한 건지 공장식으로 찍어낸 한약이 나에게 맞지 않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얼마간의 건강을 되찾은 이후로 발길을 끊게 되었다. 그래도 아주 좋은 말들을 많이 들어서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특히나 인상 깊었던 이야기는 '이런 체질은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지옥에서 신체를 끌어올린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고통스러울 겁니다.'라는 이야기였다. 그래도 명색이 의사란 양반에게서 이 정도의 공감을 얻어내는 건 꽤나 괜찮은 위로였다. 


한의원에는 90%가 여성 환자였다. 어쩌다 보이는 남성 환자는 여지없이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온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여성 환자는 삼삼오오 몰려다니며 쇼핑하듯 침을 맞고 다음 병원으로 물리치료를 받으러 이동하는 듯했다. 남녀의 수명차이는 여기서 난다. 스스로를 보살피게끔 설계되어 있는 건 아무래도 여성 쪽이다. 남성은 방치가 디폴트 값인지 한의원보다는 술집 문턱을 넘나 드나드는 것이 익숙해 보였다. 둘 다 수명에 영향을 미치는 문턱이니 선택은 본인의 몫이었다. 인명은 재천이라지만 어찌 보면 개인의 소관과 선택도 어느 정도 좌우는 할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확률이나 통계라 부른다. 


루틴은 재산이다. 


어디서 들은 기억은 없지만 오늘 아침에 불현듯 생각이 난 어구이다. 명목상의 자산가치는 없지만 인간의 삶에 꽤나 괜찮은 루틴이 있다는 건 굉장한 자산을 보유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루 깨어 있는 시간 동안 몇 시간 일지는 모르나 정해진 루틴대로 살아갈 수 있다는 건 굉장한 투자라는 생각이 든다. 적립식으로 펀드나 들 줄 알았지 스스로에게 투자를 적립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단순히 공부를 하고 미래에 투자한다는 개념과는 조금은 동떨어진 개념이다. 루틴은 삶을 지탱해 주는 버팀목일 수도 있고 삶을 나아가게 하는 추진체일 수도 있다. 건강을 지켜주고 목표한 바를 이뤄 줄 수도 있으니 재산가치로 따지자면 누군가에게는 수억을 호가하는 가치를 지닐 수도 있는 것이다. 


체력도 재산이고 부자의 자산도 재산이라면 그것들을 지켜주는 루틴이야 말로 재산 중의 재산 아닌가.


103일 차를 맞이한 아침루틴은 꽤나 잘 지켜지고 있고 진척은 없어 보이지만 큰 변화를 도모할 힘을 축적하는 듯 보인다. 자신감을 가질 때이다. 운동에 관한 루틴과 저녁에 시간을 잘 보내는 방법에 대한 모색이 필요하다. 101일 차 되는 날 아침 미국에서 종신교수로 재직 중인 분께서 주말에 파트타임으로 호텔 청소를 하신다는 브런치 글을 보게 되었다. 뒤통수가 얼얼해질 정도로 세게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나는 공업고등학교 출신이면서 번듯한 사무직이 하고 싶어 광고일을 동경했고 해오고 있다. 깨끗한 업에 대한 동경이 자칫 더럽고 불편한 일에 대한 혐오를 가지진 않았는지 통탄할 반성이 뒤따라야 할 시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사실 내가 배운 용접과 선반, 밀링 가공등은 쇠를 깎는 일이라 고열의 쇠와 절삭유가 튀며 잘못하면 손가락이나 팔이 잘리기도 하는 일이었다. 나 역시 머시닝 센터에서 작업을 하다 팔목과 발가락을 잃은 뻔했다.)


여러 사정이야 있겠지만 뭘 할지 고민할 시간에 차라리 가까운 거리의 수많은 일거리를 찾아 나서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100일 넘게 나는 나의 사명이 뭔지에 대해 고민만 하고 있었다. 


행동은 하지 않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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