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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난이 Oct 10. 2022

서울레이스 후기

빌딩이 숲이 되는 날

결론부터 말하면 PB를 했으나

아쉬운 달리기였고

서울을 달리면서

나를 느낀 하루였다.

불꽃놀이를 보고 늦게 잤지만 04시도 안돼서 눈을 뜬다.

보통은 스트레칭을 시작하지만 오른쪽 둔근과 발목에서 파스를 떼어내고 진통제를 먹을 것인가를 고민한다.

다시 손을 뻗어 핸드폰을 켜고 내 하프 기록을 분석하고 DNF한 후 침 맞고 약 먹은 지난 일주일을 회상하며 오늘 대회 페이스를 결정하지 못한다.

대회장에 도착한 나는 시험장에 도착한 수험생과 같은 의무감으로 환복하고 사진을 찍는다.

보통은 선두 쪽에서 출발하는데 오늘은 좀 특별하게 의지가 없어 뒤쪽에 서있다.

출발하고 2km의 페이스를 고민하지만 출발할 때까지 결정하지 못한다.

폭죽은 터지고 스타트라인을 통과하면서 나의 고민은 그냥 물거품이 된다.

왜냐하면 많은 인파에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초반 2km pace는 4분 40초 언저리!

이미 PB는 제비와 함께 다음 시즌을 약속하며 강남으로 날아가버렸다.


청와대를 지나고 내리막길에서 쏘아보지만

4분 20초 언저리로 뛰는 것도 쉽지 않다.

드문드문 날 아는 분들이 인사하고 앞으로 뛰어간다.

높은 빌딩이 다시 보이고 도로가 넓어졌을 때도 이번 대회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고민스러웠다.

목표도 목적도 의지도 없었고 완주 혹은 DNF 뒤에 어떤 변명을 할지 고민스러웠다.


그냥 그런 일상 같은 달리기를

황금 같은 연휴 중간 날에

도로가 통제된 광화문 대로에서

낙담하며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느 정도 주자들의 밀집도가 떨어졌을 때

속도를 낼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언제 또 막힐 수 있으니 내달려본다.

일시적으로 4분 초반을 찍는 순간

불가능한 PB를 상상한다.

그리고 실소하며 포도당캔디를 입에 넣고

다 녹을 때까지 그 상상을 계속하기로 한다.

정말 이상한 일은 지금부터이다.

코로나 이후 인터벌을 해도

1km 페이스가 4분 10초를 못 버텼는데

4분 11초가 찍히고 사탕은 다 녹아버렸다.

정말 달콤한 상상이고 행복한 1km였다.


이제 상상을 해봤으니 이성적으로 분석한다.

내 PB페이스는 4분 20초!

처음 2km를 4분 40초 언저리로,

다음 1km를 4분 20초 언저리로,

또 그다음 1km를 4분 10초 언저리로 뛰었으니 30초를 당겨야 PB이고 대략 15km가 남았으니

4분 18초 페이스로 뛰면 된다.

하지만 이것도 나에게는 무리라는 것을 잘 안다.

그래도 해보고 싶어서 부담은 후반부의 나에게 넘기기로 한다.


새 계획에 맞춰 뛰니 기분이 좋아지고 발이 가벼워졌다.

그래서 어쩔 땐 4분 5초 언저리 어쩔 땐 4분 10초 언저리로 뛰었다.

어느덧 후반부 청계천을 뛰고 있었다.

오른쪽 둔근과 햄스트링이 당겨져 온다.

속도를 늦추거나 잠깐 서서 살살 풀어줘야 할 것 같은데 전반 10킬로 기록이 너무 좋다.

그래서 아직 왼쪽 둔근과 햄스트링 상태가 좋음을

감사하기로 하고 레이스를 이어간다.

마지막 1km이다.

4분 17초 페이스를 유지하면

꿈에도 그리던 PB를 넘어서

하프 1시간 30분 벽을 허물게 된다.

그렇지만 간절하다고 모든 것이 이뤄지지는

않는다.

아픈 오른쪽도 이를 도와준 왼쪽도 모두 지쳤다.

머리에서는 달리자고 하는데 몸은 처진다.

예상하지 못 한 PB지만

기분이 너무 좋지만

3초가 너무 아쉽다.

심박수도 호흡도 너무 좋았고

케이던스도 거의 최적이었는데...

바라고 희망한다고 다 이뤄지지는 않는다.

때로는 무모한 행동과 가당치 않은 상상이

계획이 되고 꿈을 실현시킨다.

이는 완벽한 Dreams come true는 아니더라도

예상도 못 한 큰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

그날은 빌딩이 숲과 같았고

나는 그 속을 달렸으며

나만의 작은 신화 한 페이지를 썼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더 염원하게 되었다.

이 작은 일들이 일상에서도 이뤄지기를...

무모한 행동과 가당치 않은 상상을 하는 용기를 갖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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