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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빠 민구 Jan 20. 2022

EP#05 큰애라는 모순

첫째의 진주


이름으로 불리던 아이는 어느덧 동생이 셋이 되고 서순에 따라 '첫째'가 되었다.


아이는 역할의 상대성으로 인해 이제는 누군가를 챙겨주고 양보하고 보살펴야 하는 존재로서의 역할을 맡아하고 있다.


이제는 형제가 없는 아이의 비율이 50%를 넘었다는데, 이 아이가 친구들에 비해 가지고 갈 부담과 책임이 상대적으로 일찍 배송된 것은 아닐까.


다른 사람들에게는 '큰 아이'라고 부르며 첫째를 소개한다. 동생이 셋이나 있다고 추켜세우면서 말이다. 그런데 나의 이런 행동 자체가 아이가 받아야 하는 사랑의 부족분을 합리화하기 위한 부모로서의 술책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넌 하준아, 너는 이미 컸으니까 엄마 아빠가 좀 덜 보살펴주고 도와줘도 괜찮아. 같이 책 안 읽어줘도 괜찮고, 샤워도 혼자 하는 거야. 원래 그런 거야. 오히려 너는 컸으니까 동생들을 도와주고 챙겨줘야 해."라고 말이다.


하지만 첫째 아이만 객관화시켜서 본다면 아직 부모의 사랑과 관심이 충분히 필요한 '아이'이다. 부모의 관심 부족이 마음의 상처가 될 수 있는 아직 작고 어린아이이다. 


애초에 [큰애]라는 단어가 모순적이라고 생각했다. '큰애~ 큰아이~'하다 보니 그냥 무심결에 '다 컸구나'라고 생각을 해버린 것이다. 그것이 나에게도 유리하고 아이에게 충분히 해주지 못한 것들에 대한 이유도 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째 아이는 잘 크고 있다. 겉으로 봐서는 전혀.


첫째는 정말도 동생들을 챙기고 돌보고 달래고 놀아주고 걱정해주고 보살펴준다. 목욕도 나름 혼자 잘한다. 장난감 정리도 잘하고 용변도 혼자 처리하고 재워주지 않아도 잘 잔다. 실제로 상황이 아이를 성숙하게 만들어 준 것일까.


하지만 첫째 아이가 눈물을 펑펑 쏟을 때가 있다. 자주 있다.


다른 모든 장난감을 양보하고 책을 양보하고 시간을 양보했지만, 자신이 정말 갖길 원해서 사준 몇 안 되는 '새 장난감'은 빼앗기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 자신만 어린이집을 가면, 어김없이 둘째가 자신이 아끼는 '그 장난감'을 헤집어 놓는다. 둘째도 하루 종일 집에서 얼마나 심심할까- 생각하면 당연하다고 생각이 되지만, 그 부분은 첫째에게는 자신이 뺏기고 싶지 않은 마지막 마지노선인 것이다.


어김없이 나뒹굴고 있는 그 장난감으로 인해, 첫째는 집에 들어오면 입을 쩍 벌리고 엉엉 울기 시작한다. 너무 서러운 것이다.


사실 그 장난감 하나로 표출된다 뿐이지, 이 아이의 마음속에 얼마나 많은 상처들이 숨어있을까- 생각하면 마음이 먹먹하다.


처음 아빠가 되어 처음 키우는 아이이다 보니 모르는 것도 많았고 시행착오도 많았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나의 '화'를 표출했던 것들인데, 그 크고 작은 화를 저 아이가 받아내면서 생긴 화상도 있을 것이고, 앞서 말한 반복적인 양보와 덜관심으로 인한 상처도 있을 것이었다.


이미 받은 상처, 어찌해야 하나.


상처를 방치해 곪아 터지게 만들면 감염되고 썩어 버리지만, 지금이라도 잘 보살펴주고 아껴준다면 '진주'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 아이의 최대 장점으로 키워내 세상을 살아가는 강력한 무기로 세공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남을 배려하고 아껴주는 마음. 양보하는 마음. 책임감과 소속감. 독립심과 자주성. 이런 것들이 이 아이의 진주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예쁘고 가여운, 기특하고 고마운 첫째 아이에게 이제부터라도 내가 큰 힘이 되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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