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빠 민구 Nov 27. 2022

니들은 모른다 이누무쉬키들아

모르니까 그러는 것이겠지만



막내가 저녁 먹다 말고 난리를 친다. 먹기 싫다는 건지- 다른 걸 달라는 건지- 뭔지 모르겠는 실랑이가 한 참을 이어간다. 아마 이 녀석, 속으로는 "아빠는 도대체 내 마음을 이렇게 몰라 왜!!"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네 명의 아이를 키우고 있지만, 딸은 정말 또 다르다. 첫 아이를 키우는 것 같은 느낌을 많이 받는다.


"아, 이거였어?"


도대체 졸리다는 표현을 왜 이렇게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 가까스로 '잠'에 대한 욕구를 캐취 했다. 아이를 데리고 침실로 들어가 팔베개를 해서 누웠다. 발 뒤꿈치에서 뒷목까지 모든 뼈와 근육이 쑤셔온다. 몸에 성한 구석이 없는 것만 같다. 엄마가 입에 달고 살던 '삭신이 쑤신다'는 말이 아마 이 느낌인 것 같다.


그래도 등 대고 누우니 이렇게 좋을 수 없다. 통증과 더불어 안락함이 밀려온다. 맘 같아서는 저 문밖에 남은 세 녀석을 두고, 쌓인 빨래를 두고, 설거지를- 쓰레기를- 대학원 공부를- 아랍어 공부를- 부동산 문제를- 내버려 두고 이대로 잠을 자고 싶다.


저 문이 나를 지켜주나- 하고 눈을 잠깐 감았는데 그 몇 분을 못 참고 셋째가 울기 시작한다. 아내는 씻으러 갔으니 분명 셋째의 문제를 해결해줄 누군가는 없는 상황이다. 저 녀석이 문 밖에서 연신 고개를 돌리며 나를 찾고 있는 것이 눈에 훤하다. 우는 소리는 점점 커지고, 커지고, 커진다.


내가 어디 있는지 눈치챈 것 같다. 침실 문을 두드리며 울기 시작한다. 선잠이 든 넷째에게서 세상 조심스럽게 팔을 빼, 빼- 빼, 빼- 내기에 성공했다. 몸을 굽혀 일어나니 가라앉은 흙탕물이 뒤집히듯 통증이 올라온다. 문을 열고 셋째를 안아 들었다. 도대체 이놈의 감기는 왜 계속 걸리는지, 눈물과 콧물이 턱까지 흘러 떨어지고 있다.


행주치마라도 입어야 하는 걸까. 티셔츠를 하루에 두세 번을 갈아입어도 항상 내 옷 여기저기엔 애들 콧물과 음식물들이 여기저기 묻어있다. 갈아입는 것도 크게 의미가 없는 것 같다. 휴지를 찾았으나 휴지가 안 보인다. 어차피 여기저기 젖고 오염된 티셔츠 자락으로 셋째의 콧물과 기타 다양한 물질들을 훔쳐낸다.


내가 정신이 없어 대답을 못하고 있었는데, 둘째는 그런 나에게서 관심을 끌어내려고 "아빠!"를 끊임없이 불러댄다. 이대로는 몸은 부서지고 정신은 녹아내릴 것 같다. 그래서 도대체 뭔 소리를 하나 들어보니, 크리스마스에 가지고 싶은 장난감 이야기를 한다. 무슨 로봇이라는데, 설명이 장황하다. 무슨 무기를 쓰는지, 어떻게 변신하고 합체하는지- 지금으로서는 도무지 관심이 생기지 않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의준아! 아빠 지금 정신없으니까 나중에. 아빠 지금 동생 달래고 있는 거 안보이니?"


'버럭'이 +1 추가되었다. 하지만 둘째 녀석은 부당한 대우에 대해서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아빠는 왜 나한테 화내는 것처럼 말하는 거예요?"


딱히 할 말이 없다. 화낼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냥. 잠깐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내가 제일 하고 싶은 것은 [조용하게 있는 것]이다. 이런 말을 하면 아내는 빈정이 상했는지 "그럴 거면 결혼은 왜 하고 아이들은 왜 가졌어"라며 따지고 든다. 하지만 그게 아니다. 조용한 게 좋으니 결혼을 후회한다거나 아이들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말이 아니다. 결혼해서 아이들을 키워보니 [조용한 시간]이 너무 없어져서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뿐이다.


그냥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가만히 있고 싶은 그런 기분이 드는 게 잘못은 아니지 않은가. 끊임없는 소음과 과업이 밀물이 들어오듯 달려오는데, 거기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은 것뿐이다. 감각을 모두 제외시켜 버릴 수 있다면 그것도 괜찮겠다. 미각, 후각과 통각이 세트라면- 몇 시간 맛을 모른다고 해도 괜찮다. 어깨와 허리가 좀 가벼워졌으면 좋겠다.


육아를 하고 있는 몇 년 동안 많은 것들이 상했다. 물론 아내도 나보다 더하면 더했을 것이다. 이런 말을 해도, 사실 내가 원하는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경우는 많지 않다. 애들한테 힘들다고 해봤자 이해할리 만무하고, 아내는 어차피 나보다 더 힘든데 내가 징징거려봤자- 육아한다고 친구들 못 만난 지 몇 년인데 걔들한테 대뜸 전화해서 말하는 것도 이상하고, 부대 사람들도 마찬가지고.


그러거나 말거나 배부르게 먹고, 신나게 놀고, 기절하듯 잠드는 아이들을 보면 입꼬리가 올라가는 게 참 마법 같다. 내 이런 고충을 알아주거나 말거나 뭔 상관이 있겠는가. 아이들의 몫이 아닌 것을. 니들은 모른다 이누무쉬키들아. 라고 하며 볼을 꼬집어 올리고 싶을 때가 있지만- 이러거나 말거나 애들은 내 상황을 알 수 없다. 내 두통과 요통, 통장잔고 압박감과 기말고사 부담감, 피로와 불안을 알 수 없다. 이 녀석들이 다 커서 부모가 되기 전에는 말이다.


모르니까 그러는 것이겠지만 아이들이 맑다. 그래, 녀석들아 계속 맑아라. 그게 니들이 할 일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제2차 독립전쟁 : 쌍둥이 단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