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약
어디에나 있는 서점, 어디에도 없는 서점
2년 전 겨울, 경주에 있는 한 서점에 들러 시집을 샀다. 친언니와 함께 책 구경을 하다 각자 한 권씩을 구입했다. 언니와 나는 시집 한 권과 자기 계발서 한 권을 나란히 손에 들고 입구에 서서 그 맘 때 유행하던 인증숏을 찍었다.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이 서점만의 특색은
손님이 구입한 책을 [읽는 약]이라고 쓰여 있는 갈색 포장지에 담아준 다는 점이었는데, 당시에는 웃으며 넘겼지만 오늘
이 사진을 보고 있으니 어쩐지 뭉클해지더라
아프면서 글 읽는 것을 소홀히 하다 보니 마음도 같이 병 들어가는 것 같았는데, 매일 같이 약을 먹고 붕대를 감고
운동을 해도 어딘가 구멍 뚫린 느낌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느낌이 들었는데, 나는 읽는 약이 필요했던 거구나- 하고.
2019년 1월 3일.
그날은 내가 난치병 선고를 받기 전이었고, 30대 초반에
이제 막 입성한 언니를 향해 장난스레 <서른 즈음에> 노래를
습관처럼 불러주던 때였으며 매년 작성한 버킷리스트를
보며 스스로를 뿌듯하게 여기던 평범한 날들 중 하루에 불과
했다.
약 2년이 지난 오늘, 나는 그날 찍은 여러 장의 사진을
바라보며 조금은 민망하리만치 깊은 감상에 젖어들었다.
우린 그 맘 때 SNS에서 유행하던 맛집에 들러 점심을 먹고
대릉원이라는 사진관에서 나란히 마주 보고 앉아 사진을
찍었다. 여러 컷 중 각자 마음에 드는 사진을 골라 각자의
방 한 구석에 전시해놓고, 잘 나왔다며 서로를 칭찬했었다.
가끔 책장을 정리할 때쯤 마주하는 그 사진 속 나는 아무런
걱정도, 근심도 없는 사람처럼 웃고 있었다.
사실 그 당시 나는 원인불명으로 퉁퉁부은 다리를
두드리며 하루 종일 경주시내를 돌아다니며 불평했고,
얼마 전 병원에서 받은 검진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한 채
날이 갈수록 퉁퉁 붓는 스스로의 몸을 자책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진 속에서 왜 그토록 환하게 웃었는지 이해가
잘 되지 않지만 한 가지는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그날 나는 읽는 약을 스스로에게 처방했고, 그 약을 손에 쥔
것만으로도 매우 기뻤다는 사실을 말이다. 유명 맛집에서
웨이팅 없이 점심을 먹은 것도, 오랜만에 여행을 다녀온 것도
입버릇처럼 말했던 빵지 순례를 성공적으로 마친 것도 모두
내 마음 한쪽 언저리를 부풀게 하기 충분했지만
그날 처방받은 약의 효능을 이길 만큼 강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마음속에서 살아 숨 쉬는 글이 있다.
그 마음에 담긴 글들이 한 데 묶여 한 권의 책이 되고, 그 책들이 쌓여 칸칸이 정리된 책장을 채우고 책장이 모여 하나의 서점을 이룬다.
이 마음 서점에 담긴 책들은 인생을 살면서 힘들다고 느끼는
순간마다 불쑥 나타나 가장 적절한 페이지의 문장으로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가끔 위급할 때에는 사이렌을 울리며 예상치 못한 순간에
응급처치를 해줄 때도 있다. 어쩌면 내가 살면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나를 위로해준 문장들은 이 응급실에서 처방된 문장은 아닐까 하는 상상도 해본다.
그렇다면 나는 <읽는 약>을 처방받는 것을 절대 소홀히
여기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 싶다.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마음 서점들을 꾸려나가기 위해 오늘도 나는 스스로 읽는 약을 처방한다.
지금 이 순간도 내 곁을 지키는 많지도 적지도 않은 내 사람들을 위해 응급실에서 처방해주어야 할 나날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