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단계

by 이해하나

서랍 깊숙이 묻혀 있던 낡은 일기장을 꺼냈다. 페이지를 넘기다 손이 멈췄다.

빨간 벽 앞, 커다란 찰리 브라운 인형 옆에서 웃고 있는 아내 사진. 그리고 그 아래 적혀 있던 글씨들.


"1단계: 그녀의 결에 천천히 다가서기"
"2단계: 그녀의 남자친구 되기"
"3단계: 그녀의 마음 얻기, 난 여기!"
"마지막: 사랑의 결실"


지금 다시 보니 웃음이 난다. 사랑을 프로젝트하듯 목표를 세우고, 단계별로 접근하려 생각했다니.....,

더 웃긴 것은 "난 여기!"라고 적어 둔 대목이다.


2단계 때, 아내는 나와 사귈 생각도 없었고 오히려 세상 물정 모르고 너무 착하기만 한 것 같아서 상처 주지 않고 떠나보내려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일 년을 매주 빼놓지 않고 통영에서 부산까지 찾아와 우리나라 구석구석을 여행시켜 주며 성당까지 가는 성실함에 결혼하게 되었다고 했다.

상처 주지 않고 떠나보내려 했다는 말에 서운 했지만, 난 사랑의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완료했으니 됐다.


사진 속 거대한 찰리 브라운 인형 대신, 내가 그녀 곁에 있다.

그녀의 곁에 다가가려 애쓰던 시간, 남자친구가 되고 싶었던 마음, 마음을 얻기 위해 서툴게 버둥대던 날들.

그 추억들이 오늘 우리 부부를 웃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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