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시간(3)

세번째 이야기

by 작가지망생

오전11시~ 저녁 7시


내가 들어선 곳은 허름한 물류창고였다. 처음에는 '내가 혹시 취업사기에 걸려들었나?'하는 걱정도 있었지만, 그 걱정은 안에서 나오는 한 사람을 보고 놀라움으로 바뀌며 사라져 버렸다.


"아니, 임쌤 아니에요? 이런 우연이.."

나를 보며 조금 놀란 50대의 남성이 보였다. 내가 30대 초반에 근무했던 학원의 원장이다. 아주 친하지도 뭐 그리 나쁘지도 않은 사이였고, 그 당시의 나는 여행경비를 벌기 위해 1년씩 단기계약강사를 하던 때라 몇 번 회식을 하고 밥 먹은게 전부인 사람이다.

어렴풋이 그 원장이 필리핀으로 가서 무슨 사업을 한다고 했던 사람들의 말이 떠올랐다.

내가 당황할 필요도, 이유도 없었지만 그냥 멋적게 나는 웃으며 말했다.

"원장님을 여기서 뵙네요. 잘 지내셨죠?"

"이력서를 보고 동명이인인가 하고 생각했는데, 아무튼 반갑습니다"

원장 (이 곳에서는 전무이지만)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곳에서 필요로 하는 사람은 나와 많이 다른 것 같았다. 사람 마음이 간사한 것이, 분명 아까 아침까지만 해도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막상 알던 사람을 만나고 업무 환경을 보니 내 마음도 급속히 식어졌다.

유야무야 나중에 술 한 잔 하자는 빈소리를 늘어놓고 나는 다시 거리로 나왔다


시간은 오후 1시3분

배가 고픈 건지, 아니면 그냥 허전한 건지 모를 기분으로 몰로 향했다.

필리핀의 로빈슨몰은 낮에 시간 때우기 괜찮은 곳이다. 물론 카지노에 들어가서 공짜 음료를 마실 수도 있지만, 그러다가 한 번 눈이 돌아가면 음료수 값의 몇십배에 달하는 수업료를 내야하기에 나는 그냥 몰에서 쉬다가 가장 싼 햄버거 등을 먹곤 한다.

하지만, 오늘은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거의 확정된다고 믿었던 일자리가 틀어져서일까 그냥 지금은 나를 위로하고 싶어졌다. 아까 비상금으로 두고 온 돈을 제외하고 지금 내 지갑에 있는 돈은 어제 환전한 필리핀 5000페소이다. 로빈슨몰의 괜찮은 스테이크가게의 정식 가격은 900페소... 그래,, 오늘만 좀 과소비해보자!

사실, 30대에 여행으로 필리핀을 왔을때는 로컬음식들의 매력에 빠져 항상 저렴한 시장 음식만 먹었었다. 카지노를 다닐때에는 딱히 식욕이 안 생겨 쫄쫄 굶다가 돈을 다 잃고서야 비로서 남은 동전을 긁어모아 싸구려 음식들을 먹었으니, 필리핀에서 이렇게 제대로 된 식당에서 밥을 먹는 것도 거의 처음인 것 같았다.

한국에서도 그렇지만, 나만 빼고 다들 열심히 바쁘게 사는 것 같다.

평일 낮에 여유있게 패밀리레스토랑에서 혼자 밥을 먹는 팔자좋은 사람으로 보일 것 같아 실소가 새어나왔다.

하지만, 배도 고프고 아직 내가 가진 돈은 여유가 있다고 생각해서일까... 그냥 지금을 즐기기로 했다.


식사를 마치고 커피에 근처 마사지 샵에서 전신 마사지까지 받고 나니 시간은 어느새 오후4시반이었다.

이제 진짜 할 게 없다

상자곽과 같은 숙소로 돌아가기는 이른 시간이고, 해야할 일도 하고싶은 것도 없는 백수 이방인으로 돌아왔다

10년동안 끊었던 술을 다시 먹을까도 생각했지만, 그러면 진짜 스스로 인생을 끝낼 것 같아 그냥 무작정 걷기로 한다.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필리핀 마닐라의 번화가 골목을 터덜터덜 걷는다

나보다 까맣고 빼빼마른 필리핀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 사이로 습한 동남아의 열기와 특유의 냄새가 밀려든다

그래도 걷는다

땀이 비오듯하지만, 안 걸으면 큰 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걷는다. 그러다 지쳐서 여기가 어딘지도 모를 지경이 되었을 때 택시를 탄다

난 이미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가능성이 절대로 없겠지만, 내가 이 머나먼 필리핀 타지에서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거라곤 오직 그것밖에 없다.

"Go! Solair"

택시 미터기 위의 시간은 저녁 7시로 가고 있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다시 시작하는 인간실험 - 폐인모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