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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명원 Apr 21. 2023

나의 아기, 나의 친구, 나의 보호자였던 너를

               

“너는 우리와 함께 열아홉 해를 살았다. 귀는 요정의 귀처럼 뾰족하게 솟아 있었고, 까만 눈은 영특하게 빛나던 나의 깍쟁이 요크셔테리어. 우리가 함께 걸었던 호수 둘레길, 어느 해 어린이날 함께 바라봤던 금강의 푸른 물줄기, 그리고 한 여름 계곡에서 조금 무서운 얼굴로 튜브에 올라탔던 너. 우리가 함께 뛰었던 뜨거운 바닷가 모래사장. 열아홉 해의 서사가 어떻게 몇 마디로 설명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어림없는 일이지. 아무렴, 그렇고말고.”     


학교도 들어가기 전의 어린 시절, 딸은 강아지를 키우고 싶다고 떼를 썼다. 동생은 싫지만, 강아지라면 같이 살고 싶다는 다소 묘한 논리였다. 지나가는 강아지를 보고도 졸랐고, 텔레비전에 강아지가 나와도 졸랐다. 손주라면 무엇이든 두세 번 조르게 하는 법이 없이 눈앞에 갖다주는 낙에 사는 나의 아빠가 그냥 두고 볼 리가 없었다. 그렇게 태어난 지 겨우 한두 달이 채 되지 않은 앙증맞은 요크셔테리어 한 마리가 우리 집에 왔다.   

  

동생은 싫지만, 강아지를 기르고 싶다던 딸은 자기 이름과 돌림자를 넣어 아람이라고 이름을 지어줬다. 그렇게 우리 집엔 큰딸 보람이와 작은딸 아람이가 함께 하게 되었다. 하지만 동생은 싫고 강아지는 기르고 싶다고 할 때 눈치챘어야 했다. 막상 강아지가 오자 딸은 강아지에게 어른들의 애정을 빼앗겼다는 듯 서서히 강아지를 시샘하기 시작했다. 

강아지는 사람보다 빨리 여물었다. 우리 눈에는 여전히 막내 아기지만, 사람의 나이보다 더 빨리 나이를 먹는 아람이는 금세 집안 서열 중 딸이 꼴찌라는 것을 눈치챘으므로 서서히 딸을 무시하기 시작했다. 보람과 아람, 그 자매들은 종종 서로의 방식으로 상대방을 골려주고, 싸우기도 하며 함께 나이를 먹어갔다.     


“얘는 꼭 고양이같이 암상궂게 생겼냐.”

아람이를 볼 때마다 종종 엄마가 하던 소리였다. 요크셔테리어는 영국이 원산지이며 이름에서 짐작되듯 잉글랜드의 요크셔에서 광부들이 쥐잡기용 개로 이용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 요크셔테리어의 혈통과도 관련이 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나 쌀쌀맞고 깍쟁이였던 아람이는 늘 엄마에게 고양이 같다는 소릴 듣곤 했다. 그래도 부모님 댁에 종종 데려가면 아람이는 늘 엄마 치맛자락에 앉아있길 좋아했다. 타박하는 엄마도 치맛자락에 올라오는 아람이를 모른 척 내버려 두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부모님 댁엔 루비라는 이름의 새로운 요크셔테리어 한 마리가 식구로 들어왔다. 근처 애견샵이 폐업하며 더 이상 기를 수 없게 된 아이를 맡아 키우게 된 것이다. 같은 요크셔테리어였지만 아람이와는 사뭇 다른 녀석이었다. 짖는 법도, 화내는 법도 없었다. 애견샵 한구석에서 일생을 보내며 여러 번 출산하고, 새끼들을 떠나보냈다고 했다. 매사에 기가 죽어 눈치를 보는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엄마는 너무 순해서, 너무 기가 죽어있어서 더 마음이 간다고 그 녀석을 챙겼다.

이제 부모님 댁에 가면 아람이의 친구가 있으니 서로 잘 지낼 거라는 건 사람들의 생각일 뿐이었다. 새 요크셔테리어 루비가 부모님 댁에 자리를 잡고 난 이후, 아람이는 루비 가까이 가지도 않았으며, 자기 옆으로 오지도 못 하게 했다. 그저 멀찍이 떨어져서 날이 선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엄마가 아무리 오라고 불러도 다시는 치맛자락에 올라가는 일도 없었다.     


여러 해가 지나 루비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부모님 댁에 아람이와 함께 가며 귀에 대고 말해주었다. 

“이제 할머니 댁에 루비는 없어. 루비는 무지개다리를 건너갔어.”

알아듣는지 마는지 가만히 있던 아람이는 현관문을 열어주자 쏜살같이 뛰어 들어가더니 루비가 평소 머물던 베란다를 들여다보고, 방마다 확인하듯 들어가 보더니 몇 년 만에 다시 할머니 치맛자락에 올라앉았다.      

가끔 나는 강아지들이 사람의 말을 어디까지 알아듣는 것일까 종종 궁금하다. 어려서부터 늘 개와 함께 살아왔지만, 나는 그들의 생각을 알 수는 없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도 아니므로 그것은 여전한 궁금증으로 남는다. 그래도 강아지들이란 굳건하게 비밀을 지켜주는 의리 있는 친구이며, 때로는 나혼자가 아니구나 싶은 든든한 동반자의 마음을 전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그들은 사람보다 빨리 어른이 되고, 빨리 늙었다.   

   

아람이도 열두 살이 지나면서부터 치매가 오기 시작했다. 자율급식을 하던 녀석이 밥을 먹은 것을 기억 못 해 매번 왕창 먹어버렸다. 몇 번을 그렇게 터질 듯 핏줄선 배를 내밀고 있게 된 다음부터 더는 자율급식을 할 수 없었다. 좋아하던 사료가 딱딱해 제대로 씹지 못하고 매번 밥그릇 앞에서 망설이는 것을 보고 캔과 습식사료로 메뉴를 바꿔주어야 했다. 계단은 커녕 살짝 경사진 오르막도 오르지 못해 우두커니 서서 도움의 손길을 애처롭게 기다렸다. 

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냄새를 맡지 못했다. 살짝 과자 귀퉁이를 뜯는 소리에도 득달같이 뛰어왔던 녀석이 이제는 바로 옆에서 과자봉지를 소리 내서 부욱, 뜯어도 알지 못했다. 우리는 처음에는 웃었지만, 이내 마음이 무거워졌다. 가장 어린 아기였던 아람이가, 이제는 가장 나이 든 늙은 개가 되어가는 모습을 보며 종종 아람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아람아, 만수무강하셔야돼!”

슬개골 수술을 하고 불편한 뒷다리를 끌면서도 화장실에 가서 볼일을 보던 녀석이 아람이였다. 그랬던 녀석이 이제 대소변은 아무 데나, 아무 생각 없이 싸고 다녔다. 때로는 가족들을 보고 쉰 목소리로 짖었는데, 마치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이들에게 짖듯 했다. 아람이는 어쩌면 우리도 잊었을지 모른다. 동물의 치매도 사람의 치매와 다를 것이 하나 없었다.     


일어나지 못하고, 곡기를 끊은 아람이를 데리고 동물병원에 갔다. 담요에 싸안고 병원에 들어섰을 때 오래 다닌 병원의 수의사가 애처로운 눈으로 아람이를 봤다. 

“안락사는 안 시키실 거지요?”

수의사의 입에서 나온 안락사라는 단어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고개를 젓는 나에게 의사는 말했다. 집에 데려가서 가만히 두라고. 억지로 먹이지도, 애써 씻기지도 말고 그저 편안하게 가만히 두라고 했다. 그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았다. 

담요에 싸안은 아람이를 데리고 집으로 걸었다. 

“아람아, 밖에 나오니까 좋지? ”

횡단보도에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는 동안 늘어져 있던 아람이는 고개를 잠시 들고 앞을 봤다. 아직도 그 순간의 아람이 표정을 떠올릴 수 있는데, 그것은 아람이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보인 자기 의지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아람이는 고개를 들고 그저 가만히 동네 풍경을 응시했다. 가을이 오는 바람과 아직 여름이 묻어있는 햇살. 달리는 차들과 지나가는 사람들. 요즘도 간혹 그 횡단보도에 서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릴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람이의 눈 속에 담겼을 그날 풍경을 본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더 이상 아람이에게 만수무강하셔야 해, 따위의 말은 할 수 없었다. 그 작은 아이의 가뿐 숨소리는 집안 어디서나 들렸다. 나는 숨 가빠하는 아람이가 불쌍했지만, 안락사를 떠올릴 때면 더 무서워 가슴이 떨렸다. 

‘아람아, 나는 절대로 할 수 없어. 그런데 네가 이렇게 오래 아파서 힘들어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그것도 알 수 없어. 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사람일까.’

사료도, 물도 입에 대지 않은 채 딱 나흘을 누워 앓던 아람이는 결국 내가 잠깐 잠이 들었던 새벽, 혼자서 무지개다리를 건너갔다. 이른 새벽 일어났을 때 집안은 평소와 달리 낯선 고요에 잠겨 있었다. 아람이의 거친 숨소리가 가득하던 공기와 사뭇 다른 그 아침, 나는 소리 내어 한참을 울었다. 나의 모든 비밀을 지켜준 충실한 친구, 혼자일 때도 혼자라고 생각하지 않게 해주었던 든든한 내 보호자, 열아홉 늙은 개가 되었어도 너는 나의 영원한 아기.     


아람이가 떠나고 얼마 후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나는 작은 다리를 건너 아주 작은 섬에 들어갔는데, 그 섬의 모든 것은 내 무릎높이밖에 되지 않았다. 그 작은 집들과 골목 사이로 뛰어다니는 아람이를 봤다. 

껴안고 부벼보지도, 머리를 쓰다듬어 주지도 못한 채 그 꿈에서 깨어났지만 나는 서운하지 않았다. 무지개다리를 건너간 아람이가 사는 동네인가 봐, 하는 내 말에 가족들이 웃었지만 다들 저마다의 표정으로 아람이를 그리워했다.     


아람이가 떠난 지는 이제 십 년이 다 되어온다. 사람보다 빨리 나이 먹는 개를 더는 기르지 말자 했지만 우리는 다시 강아지를 기른다. 짧은 견생 일 년 차에 이미 두 번이나 파양을 겪고 세 번째로 우리 집을 찾아온 몰티즈의 이름이 ‘루비’라고 했을 때 우리 가족은 모두 신기해했다. 루비라니.

애견샵 구석에서 살다 부모님 댁으로 왔던 요크셔테리어 루비가 무지개다리를 건너가고, 그다음 해 나의 아람이가 같은 길을 갔다. 그리고 또 두 해가 지나 루비를 돌보고, 아람이에게 무릎을 내주었던 나의 부모님도 모두 떠나셨다. 

먼저 무지개다리를 건넌 강아지들은 그곳에서 살았을 때 함께한 주인들을 맞이한다고 한다. 루비와 나의 아람이도 그곳에서 나의 부모님을 따뜻하게 맞아줬을까. 지금쯤은 다 같이 편안할까.    

 

“나는 여전히 기억하고, 추억한다. 나의 아기, 나의 친구, 나의 보호자였던 너를.

그리고 여전히 기대하고, 바란다. 너도 나를 항상 기억해주겠지, 기다려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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